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태수 「눈(雪)」

by 답설재 2014. 12. 10.

 

 

2013.12.26. 영동사거리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현대문학』 2013년 2월호, 157쪽.

 

 

 

2014. 12. 10(수).

택시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친구한테서 온 전화를 받은 운전기사가 그에게, "오늘밤에 눈이 많이 온다!"고 '빅뉴스'로 전했습니다. 눈이 오면 운전하기만 어려울 텐데 기사는 즐거운 듯했습니다. 무슨 축제를 기다리는 젊은이 같기도 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 해의 첫눈이 내렸다"고 쓴 내 친구 블로거를 생각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에 들어왔다가 볼일을 보러 나가 봤더니 그새 정말로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곧 들어갈까 하다가 엘리베이터가 내려왔지만 타지 않았고, 어둑어둑한 현관 그늘에 서서 눈 내리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제법 쌀쌀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렸고, 끝장난 일들이고, 잊어야 마땅한 일들뿐인 곳이지만 소백산맥 기슭의, 자주 눈내리는 산촌을 떠나 이곳에 정착해 있습니다. 이제 영영 떠나기 전까지는 잊어야 마땅한데 그런 것들을 또 생각합니다. 상처(傷處)를 들여다보듯 합니다. 이 블로그에 눈 이야기를 좀 써야 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도 시인이라면 '눈 시'를 한 편 써서 실었을 '눈 내리는 밤'입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율 「이달의 거리」  (0) 2015.01.25
박강우 「그림 일기」  (0) 2015.01.06
문효치 「개망초」  (0) 2014.11.09
박두순 「사람 우산」  (0) 2014.10.07
박형권 「탬버린만 잘 쳐도」  (0) 2014.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