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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강우 「그림 일기」

by 답설재 2015. 1. 6.

그림 일기

-2014년8월27일 수요일 날씨 맑음

 

 

박강우

 

 

아빠는 눈이 세 개다 나는 눈은 두 개다 왜 그럴까 엄마는 눈이 한 개다 하지만 동생은 눈이 두 개다 아빠와 엄마의 눈을 합해서 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두 개씩 나눠 가진 걸까 삼촌은 이마에 뿔이 있다 아빠는 이마에 뿔이 없다 그런데 삼촌은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삼촌은 뿔이 달린 동물을 좋아한다 나도 뿔이 달린 동물을 좋아한다 혹시 나의 이마에도 뿔이 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 세수를 하며 이마를 만져본다 뿔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엉덩이에서 꼬리가 나려고 한다 삼촌은 옷 속에 꼬리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삼촌은 왜 엄마와 아빠보다 삼촌을 좋아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삼촌은 변태일까 선생님은 엄마와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조심하라고 했다 삼촌은 너무 착하다 그럴 리가 없다 삼촌은 나와 똑같이 눈이 두 개고 나처럼 뿔 달린 동물을 좋아한다 엄마와 아빠는 뿔 달린 동물을 싫어하는데 꼬리 달린 나를 좋아하실까 오늘부터는 바로 누워 자려고 하면 자꾸 옆으로 돌아누워진다 자라고 있는 꼬리 때문이겠지 내일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물어볼 게 너무 많다 선생님도 꼬리를 숨기고 있는 걸까

거짓말을 한 이튿날 새벽부터는 한동안 잠이 깨자마자 엉덩이를 만져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 순간은 불안과 안정이 뒤섞이거나 교차하는 것이었고, 그게 누구의 역할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정확하게 일일이 찝어내지 않고 그렇게 더러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과 섞여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세상에 대한 은밀한 고마움도 느꼈습니다.

 

 

 

그 경험은, 그처럼 파릇파릇한 새싹일 때는, 모든 아이들이 다 꽤 괜찮았었는지도 모른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리 이상야릇한 녀석이라도 진심으로 "나는 놀부를 존경해!"라거나 놀부에게 대 감동을 받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 아이들이 커서 온갖 일들을 벌이는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우리를 마침내 여기까지 데리고 온 욕망, 혼돈 같은 것들, 그리고 그 부피와 무게가 점점 줄어드는 수치심……

 

정말 '막' 뿔도 쑥쑥 솟아나고, 자고 나면 눈도 하나 없어지고, '막'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령, 사기꾼은 얼굴이 서서히 녹색으로 변하고, 돈을 사람보다 오히려 더 소중한, 이 세상 최고의 가치로 삼는 그런 인간은 얼굴이 새파랗게 혹은 돈색으로 변한다면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 다 알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천하게 몹쓸! ㅉㅉ.'

'에이, 더러운…… 돈밖에 모르는 새파란 놈!'

'한 핏줄을 타고 났는데 저 인간은 어떻게 저렇지? ㅠㅠ' …………

 

그렇지만, 다 덮어주는, 혹은 그렇지 않은 놈인 척할 수 있는 세상이 어쩌면 좋은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얼굴이 새파래지거나 하면 그런 사람들이 지금처럼 그냥이나 있겠습니까?

"좋아! 이렇게 된 바에야!"

들고 일어나 세상을 아주 쑥대밭을 만들려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걸 스스로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 새파란 사람들도 더러 저런 시는 좀 읽어보면 좋을 텐데……

새파랗게 보이거나 아무래도 그런 인간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옆에 있거든 이 시를 좀 보여 주십시오.

 

'가만 있어봐. 나는 지금 얼마나 새파랗지?'

 

 

 

 

 

 

 

하늘을 보면, 이 나이에도, 오늘 날씨는 어떻게 표시해야 할까 싶어지고, 문득 "우리 땐" 있지도 않았던 그림일기나 한번 써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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