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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찬란한 스트레스」 찬란한 스트레스 단풍은 잎들이 받은 스트레스란다 늦가을 찬바람 속에 사는 스트레스란다 스트레스인데도 찬란하다 곱디고운 색깔. (우리 스트레스는 무슨 색깔일까 피로하다, 무슨 색? 화가 치민다, 무슨 색? 신경질 난다, 무슨 색? 미움이 끓는다, 무슨 색? 욕심이 얽혔다, 무슨 색?) 잎들의 찬란한 스트레스 앞에서 우리의 스트레스 색깔은 얼마나 유치한가 찬란한 스트레스를 갖고 싶다. 박두순 3시집 『찬란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싶다』(문학과문화, 2014), 15.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 그 앞에서 무릎도 꿇어야 한다 삶의 꽃도 무릎을 꿇어야 보인다. ― 「꽃을 보려면」 전문 한때 중학교 국어책에 이 시가 실렸던 내 친구 박두순 시인이, 지난 초여름에 시집을 냈습니다. '찬란.. 2014. 8. 6.
「서로를 욕되게 말자고」 서로를 욕되게 말자고 유안진 아지랑이 눈빛과 휘파람에 얹힌 말과 안개 핀 강물에 뿌린 노래가 사랑을 팔고 싶은 날에 술잔이 입술을 눈물이 눈을 더운 피가 심장을 팔고 싶은 날에도 프랑스의 한 봉쇄수도원 수녀들은 붉은 포도주 '가시밭길'을 담그고 중국의 어느 산간마을 노인들은 .. 2014. 5. 27.
조지훈 「석문石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다"고,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고,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 2014. 5. 18.
서정주 「신부」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2014. 5. 13.
「라일락」 강남대로변의 라일락입니다.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 주눅이 들어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렇게 볼품없는 남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예전처럼 눈이 자그마한 여인조차 눈에 띄지 않고 하나같이 왕방울 같은 눈에 차림들이 영락없는 영화배우들 같아 보여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그 길에서 도저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향기로, 라일락이 불러세웠습니다."나, 여기 있다!"어느 집 정원의 해묵은 라일락처럼 그리 자랑스러운 자태도 아닙니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만큼의 향기를 내뿜는지, 그 분망한 길에서…… 불연듯 저 지례예술촌장 김원길 시인의 「라일락」이 생각났습니다.접근하기 어려워서 아예 포기해버린 소녀, 무언가 복잡한 일들에 얽혀 있어서 그 생활.. 2014. 4. 11.
백무산 「국수 먹는 법」 국수 먹는 법 백무산 국수 먹을 때 나도 모르는 버릇꼭 그렇게 먹더라는 말 듣는 내 버릇아버지 짐자전거 연장통 위에 앉아먼짓길 따라나선 왁자한 장거리 국수집빈 공터에 가마솥 내건 차일 친 그늘긴 의자에 둘러앉은 아버지들마차꾼들 지게꾼들 약초 장수 놋그릇 장수싸리채 장수 삼밧줄 장수 패랭이 쓴 재주꾼들허기 다 채울 수 없는 한 그릇 국수 받아놓고젓가락 걸치고 국물 먼저 쭉 바닥까지 비우고는메레치궁물 좀 더 주쇼, 반쯤 채운 목에 헛트림하고 나서굵은 손마디에 부러질 듯 휘어지던 대젓가락천천히 놀리던 손톱 문드러진 손가락들남매인지 부부인지 팔다 만 검정비누 든 봇짐 벗어두고둘이서 한 그릇 시켜놓고 멸치국물 거듭청해 마시고 나서 천천히 먹던 국수지친 다리 애간장에 거미줄처럼 휑한 허기숭숭 뚫린 허기 다 메울 수.. 2014. 4. 8.
「겨울잠」「문득」「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겨울잠」 「문득」 「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現代文學』 2014년 1월호에서 세 분의 늙은 시인이 쓴 시를 모았습니다. 세 노인의 편안한 시를 다시, 또 다시 읽고 싶어서였습니다. 편안한 것이 이렇게 좋구나 싶어서였습니다. 나도 이렇게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욕심이라면, 그.. 2014. 3. 23.
최하림 「구석방」 산 아래 이 층 목조 건물은 긴 의자와 십여 개 유리창이 일제히 남으로 열려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왔다 개들이 컹컹컹컹 짖어댔다 나는 고해성사실과도 같은 이 층 구석방으로 들어가 옷자락을 여미고 숨었다 구석방은 어두웠다 건축가 김수 선생님은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라고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 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 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 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꺼내 마셨다 토마토도 몇 개 베어 먹었다 밤은 .. 2014. 3. 16.
김승희 「나에겐 나만 남았네―사랑의 북쪽」 나에겐 나만 남았네 ―사랑의 북쪽 김승희 어느덧 나에겐 나만 남았네 나에겐 나만 남고 아무도 없네 나에겐 나만 남고 당신에겐 당신만 남은 그런 날 당신은 당신이 되고 나는 내가 되고 서로서로 무죄일 것 같지만 그렇게 남으면 나는 나도 아니고 당신은 당신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아무도 아니고 단어들이 먼저 부서지네 문장이 사라지고 폐가 찢어지고 사전이 날아가고 책이 산화하고 진흙 속에 고동치는 가슴소리뿐 진흙 속에 눈을 감고 중얼거리네 나에겐 나만 남았네 진흙만 남았네 ――――――――――――――――――――――――――― 김승희 1952년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태양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014. 3. 10.
「매일매일 김씨」 매일매일 김씨 김남호 오늘도 출근을 하네 눈도 코도 없는 내가, 눈치도 코치도 없는 내가, 낌새도 모르고 뵈는 것도 없는 내가, 건들건들 출근을 하네 입구도 출구도 없는 직장으로 출근을 하네 퇴근은 없고 출근만 하네 김 과장님 하고 부르면 절대 안 돌아보네 김 선생님 하고 불러도 .. 2014. 3. 3.
김원길 「취운정 마담에게」Ⅱ 시인들은 사랑 얘기를 어떻게 씁니까? 뭘 묻느냐 하면, 겪어본 얘기를 시로 표현하는지, 아니면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들인지, 그게 궁금하다는 뜻입니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그 배역에, 두어 시간의 그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 관념과 경험, 지식, 희망과 기대 같은 걸 모두 불어넣어 연출한다는, 그리고 그럴수록 멋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그래서인지, 아예 자신의 생애를 자신이 맡았던 배역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한 편의 멋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가려다가 결국은 어려운 말년을 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고, 정작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른 부문의 연예인 중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것.. 2014. 2. 19.
이만용 「섣달 그믐날」 섣달 그믐날 해는 가도 나 죽은 뒤에 다시 또 돌아오고 풍경은 전과 똑같고 초당은 한적하겠지. 남은 자들 속에서는 멋진 사람 찾기 어려워 혼백인들 이 세상을 무엇 하러 그리워하랴. 술꾼의 자취 서린 무덤 그 위로 계절은 지나가고 시인의 명성 남은 옛집 강산만은 지켜주겠지. 낙화유수 인생이라 한평생 한이러니 세상만사 유유하다 상관 않고 버려두리라. 除夕(제석) 歲去應吾死後還(세거응오사후환) 風光依舊草堂閒(풍광의구초당한) 典型難覓餘人裏(전형난멱여인리) 魂魄寧思此世間(혼백영사차세간) 酒跡荒墳隨節序(주적황분수절서) 詩名故宅有江山(시명고택유강산) 落花流水平生恨(낙화유수평생한) 一切悠悠摠不關(일절유유총불관) 이만용(李晩用·1792~1863) 19세기 전반의 시인 동번(東樊) 이만용이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 썼다... 2014.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