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문득」
「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現代文學』 2014년 1월호에서 세 분의 늙은 시인이 쓴 시를 모았습니다.
세 노인의 편안한 시를 다시, 또 다시 읽고 싶어서였습니다. 편안한 것이 이렇게 좋구나 싶어서였습니다.
나도 이렇게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욕심이라면, 그럼 자꾸 편안해지면 좋겠습니다.
겨울잠
오탁번
요즘 나는 나비와
겨울잠을 잔다
꿈결에 원색도감 『한국의 나비』를 펼치면
별별 나비가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와
살뜰히 데이트를 즐긴다
앞다리가 퇴화한 네발나비는
오직 흘레밖엔 몰라
동지섣달 다늙은이 힘을 쏙 빼 간다
팔랑나비과에 속하는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는
크기는 작은데 머리만 커서
날아오를 때 팔랑팔랑 법석을 떨며
한겨울 심술꾼 눈보라 되어
다독다독 덮은 마늘밭 솔잎을
몽땅 다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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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7년 『중앙일보』 등단. 시집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우리 동네』 등.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사>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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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생이면, 시인은 이른을 넘겼습니다.
ㅎㅎㅎ
도감 『한국의 나비』에는 온갖 여인들이 다 등장한답니까?
하기야 시내 여자대학교 세미나장 찾아가는 길에, 마침 행사를 마치고 강당을 나서는 수백, 수천의 여학생 무리를 보면 늦은봄 화창한 날 온갖 나비가 부산한 꽃밭 같아서 어느 나비에 눈을 두어야 할지 눈앞이 아른거리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 나비들은 다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별별 나비가 다 있겠지요.
흘레밖에 모를 것 같은 나비도 보였을까요?
어느 예쁜 네발나비가 그런 나비였으면 좋겠다, 동지섣달 삼동 내내 들어앉아서, 그 나비만 바라보며 해를 넘기면 좋겠다는 뜻일까요?
그러고보면, 온통 흘레 얘기 같은 시를 써놓고는
'내가 지금 진짜 흘레 생각에 묻혔나?' 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른이면 요즘 나이로는 아직 젊은층, 적어도 신노년층이라고는 하지만, 말이 그렇지, 사실은 말뿐인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現代文學』 2014년 1월호, 184~185쪽.)
문득
―백석 탄생 백 주년에
천양희
백석역을 지나다 문득
백석을 생각한다
이름이 백석인
역 하나 지나갔을 뿐인데
백 년이 지나간 것처럼 문득
간절하게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자야를 생각는데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백석은 산골로 가고
아닌 싸움에도 지고 돌아와선
어쩌자고 나는 또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가는
흰 바람벽을 생각는데
백석에서 정주까지
그 멀던 역들은
누가 다 지나간 백 년일까
문득 생각는데
어느 사이에 누구도 없이
나 하나는
애인의 문학상을 만든 자야가
문득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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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너무 많은 입』 등. <소월시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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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그의 영혼이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 오게. 오면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아주리라…………
시인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 만약 저 같으면 당장 연락해 줄 것 같습니다.
(『現代文學』 2014년 1월호, 194~195쪽.)
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홍윤숙
고향 외갓집 뒤울안 밖에
사오백 그루의 밤나무 숲이 있었는데요
오월이면 하얀 밤꽃 송이들이 수천수만 송이
다닥다닥 피어서 온 산 온 마을에 진동했어요
나는 그 밤꽃 향기에 취해
뾰족한 밤나무 잎사귀에 살 긁히어
쓰라린 것도 잊어버리고 숲으로 숲으로 들어갔어요
밤꽃 향기에 숨 막혀 가슴 헉헉 숨도 못 쉬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걸어 나와
땅바닥에 폭삭 엎어지고 말았어요
엎어진 코앞에
살살 내 얼굴 간지럽히며
해죽해죽 웃는 계집애들
계집애 같은 하얀 꽃송이들이
나 좀 봐라 나 좀 봐라
볼 꼭꼭 찌르며 웃고 있었어요
나는 그 보드라운 얼굴들을
아삭 깨물고 싶었지만
왠지 가여운 생각이 들어
얼굴 폭 숙이고 그 애들 속에
파묻혀버리고 말았어요
외할머니 나를 찾으러 나오시며
홍례야, 홍례야, 부르시는 소리 들으며
가물가물 잠들 듯이 정신 잃고 말았어요
깨어보니 토방 삿자리 위에 뉘여 있었어요
할머니 어떻게? 쳐다보는데
외삼촌이 함박웃음으로 내려다보며
야! 이눔아 건넛마을 이 참봉댁 머슴
처녀 총각이 주인 몰래 사랑하다 이룰 수 없어
하룻밤 밤꽃 한 아름 따다가
저희들 자는 방 머리맡에 깔아놓고
방문 꼭꼭 잠가놓고 죽었느니라
나는 왠지 슬퍼져 눈물 찔끔 짜내고 말았어요
일곱 살 나던 해 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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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숙 1923년 평북 정주 출생. 1947년 『문예신보』, 148년 『신천지』 등단. 시집 『장식론』 『타관의 햇살』 『마지막 공부』 『지상의 그 집』 『쓸쓸함을 위하여』 등.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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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생 홍윤숙 시인의 시는, 할머니 얘기여서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 아득한 세월 속의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기억이라니……
열두어 살 때 처음 사촌누나 꾐에 빠져 소주 마셨던 때처럼…………
(『現代文學』 2014년 1월호, 196~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