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로변의 라일락입니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 주눅이 들어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렇게 볼품없는 남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예전처럼 눈이 자그마한 여인조차 눈에 띄지 않고 하나같이 왕방울 같은 눈에 차림들이 영락없는 영화배우들 같아 보여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그 길에서 도저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향기로, 라일락이 불러세웠습니다.
"나, 여기 있다!"
어느 집 정원의 해묵은 라일락처럼 그리 자랑스러운 자태도 아닙니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만큼의 향기를 내뿜는지, 그 분망한 길에서……
불연듯 저 지례예술촌장 김원길 시인의 「라일락」이 생각났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워서 아예 포기해버린 소녀, 무언가 복잡한 일들에 얽혀 있어서 그 생활이 안개 속 같을 줄 알았는데, '어?' "아침 먹고 학교 갔다 와서 놀다가 저녁 먹고 누워잤다"는 일기를 쓰고 있는 소녀 같은 시 「라일락」.
시인의 저 가슴속을 옹달샘 바닥처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시 「라일락」……
예언이 된 시들 / 김원길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 중에서도 가장 깊이 생각하고 다듬어서 하는 말이 시이다. 시를 쓰다보면 당연히 오욕 칠정의 감정을 진하게 드러내게 마련이고 그때 썼던 무심한 말이 씨가 된 건지 어느 날 정말 '이별', '고독', '슬픔', '절망', '통한' 따위가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주술력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글쓰기가 겁나고 심지어 어둡고 슬픈 시는 그만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인은 태생적으로 많은 상상을 하는 사람이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슬픈 상황을 미리 느끼고 예상하여 쓰는 수가 허다하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 외에도 수많은 비극적 상황을 그의 전작 속에 그려 놓았으니 그의 실제 생애 중 불행한 처지에 맞닥뜨려선 자신이 그린 비극과 일치하는 경우도 발견했으리라. "진달래꽃"과 "초혼"같은 애절한 시를 쓴 우리의 소월 선생 또한 어떤 여성과 어떤 사랑을 했는가는 기록이 없지만 어쩌면 상상으로 실연시를 먼저 썼을 수도 있고 나중에 그런 비극적 결말을 맞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지 않는가.
나는 젊은 시절 그리움도 많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읽은 영향으로 나의 초기시의 대부분은 실연시였다. 바이런이나 소월처럼 실감나게 감정도 섞어 넣었다. 그러나 현대 시인답게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름 수법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정원 한 쪽의
라일락 그늘에 서서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반가웠으나
휠체어에 앉아서
그녀를 향해
쓸쓸히 웃어주었다.
내게로 다가올 때
웨이브 진 머릿결이
옛날처럼 나부끼었다.
손길이
이마에
꽃향기로 얹히더니
시야엔
다시
라일락 꽃더미뿐,
그 때 나는 내 속에서
남몰래 울고 있던 한 사내의
울음의 끝 부분을 듣고 있었다.
(라일락 전문)
어쨌거나 나는 애인에게 고백도 못해 본 채 나 혼자 이룰 수없는 사랑을 설정해 놓고 "산 접동새처럼"(미당 평) 슬픈 시를 써댔던 것이다. 그런데 뒷날 그게 더러는 내게 실제 상황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연속되는 시련이 내가 쓴 시 때문인 것 같아 어느 순간 그런 청승맞은 시를 쓰지 않기로 했다. 김종길 선생 말처럼 "병 없이 앓는"(솔개 중)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두보처럼 울지 말고 이백처럼 말없이 웃다 보면 팔자가 좀 피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해탈한 경지, 근심 없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도연명의 시와 이백,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를 그래서 좋아했다. 나는 고향 사람들의 우스개를 취합하여 "안동의 해학"을 펴내는 동안 상당한 웃음치료 효과를 봤고, 요즘은 지난 세월 행복했던 시간들을 경쾌한 수필로, 고생했던 이야기도 유머러스하게 쓰며 지내고 있다. 그것도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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