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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서정주 「신부」

by 답설재 2014. 5. 13.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백꽃 보러갔더니』(시인생각, 2012), 75쪽.

 

 

 

 

 

 

 

 

 

내가 지금 꼭 그 꼴입니다. 40년이 넘었는데, 정신이 들 때는 '아! 이러면 안 돼!' 하지만 그건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언제나 "이래라 저래라!"고, 성질부리고, 못마땅해 하고, 짜증내고, 아주 조금만 불편해도 죽을 것처럼 나대고, 제구실은 한 가지도 못하면서  걸핏하면 날뛰기 일쑤입니다.

 

예전에 국어를 가르친 선생님께서 이 시를 소개할 땐 '어떤 녀석인지, 아무리 옛날이기로 참 어처구니없는 놈이고, 기막힌 사연이구나……'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지난겨울 어느 날, 경춘선 열차로 시내 나갈 때, 차창을 내다보던 아내의 실루엣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좀처럼 표를 내지 않게 되었지만 사실은 들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껴둔 장갑까지 끼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시내에 나가 점심을 먹고, 20만 원 정도 하는 연습용 장구를 사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때를 생각하면,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게 분명합니다. 평소 이것만 알고 있어도 나는 '정상인'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