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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조지훈 「석문石門」

by 답설재 2014. 5. 18.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다"고,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고,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고,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다"고 했습니다.

 

 

서정주 시인이 그렇게 썼습니다(『신부』)

 

 

 

 

 

 

그게 기가 막혀서, 그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린 신부, 신부의 그 기막힌 사연은 세상 사람들이 다 기가 막힌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저 신랑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렇게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은 저 신부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 또한 기막힌 가슴, 기막힌 사연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면, 혼자서라도 무슨 말인들 했을 것 같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갔다는 얘기가 어디에 있을 것 같아서, 이런 봄에는 어떻게 생각하고, 여름, 가을, 겨울 지나서 그 다음해 봄에는 또 어떤 생각을 했고, 그렇게 하며 그 일생을 어떻게 지냈는지 그도 참 기막힌 일생일 것 같아서, 그동안 살펴본 몇몇 시들을 생각해봐도 저 신랑의 입장을 나타내는 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저 신부만큼은 아니어도, 아니 저 신부에게는 아예 댈 수가 없다 해도, 그 또한 기가 막힌 일생이 아니었을까 싶긴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해주고 싶은 시인은 거의 없기 때문일까요? 시인 중에는 애초에 그런 짓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기 때문일까요?

 

정말이지 이건 돌팔매를 맞을 일이겠지만, 만약 시를 쓸 줄 안다면 나라도 나서서 그 심정을 좀 읊어 놓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분명히 저 신부 이야기지 싶은 시는 찾았습니다. 「석문」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렵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지 못 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조지훈 『승무』(시인생각, 2013),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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