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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원길 「취운정 마담에게」Ⅱ

by 답설재 2014. 2. 19.

 

 

 

시인들은 사랑 얘기를 어떻게 씁니까? 뭘 묻느냐 하면, 겪어본 얘기를 시로 표현하는지, 아니면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들인지, 그게 궁금하다는 뜻입니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그 배역에, 두어 시간의 그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 관념과 경험, 지식, 희망과 기대 같은 걸 모두 불어넣어 연출한다는, 그리고 그럴수록 멋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예 자신의 생애를 자신이 맡았던 배역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한 편의 멋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가려다가 결국은 어려운 말년을 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고, 정작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른 부문의 연예인 중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시인의 경우를 묻는 것입니다.

가령, 「취운정 마담에게」라는 멋진 시를 쓴 김원길 시인 같으면, 언젠가 실제로 그런 아름다운 마담을 만나본 것 아닌가, 아니라면 그런 마담을 만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그 시인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거나 그런 경험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되면 참 재미있겠는데, 글쎄요, 그 시인이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으면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지탄과 원망을 들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참 씁쓸한 속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하자면 그 시인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거나 그런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아주 반대되는 고백을 듣기 쉽상일 것입니다.

 

어쨌든 김원길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혹 연상의 여인을 만난 걸 에둘러 표현한 시가 아닐까?' 시인은 굳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써주었는데도, 저는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살을 붙이고 싶어하고 있으니……

 

 

나의 등단기

 

1969년 겨울, 서울서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방학이었지만 나는 데리고 있던 동생들만 안동의 집으로 내려보내고 삼선교 자취방에서 혼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넘겼다. 나는 그 시절 학교 근무와 대학원 수업과 두 동생 학교 다니는 것을 챙기느라 바빠서 시를 쓸 수 없는 게 안타깝던 차 방학을 맞았으니 이번엔 시간 여유를 갖고 조용히 시만 생각하며 혼자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많이 왔었다. 나는 늦은 아침을 먹고 오버를 입고 눈길에 나섰다. 휴일 아침거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햇볕에 녹고 있는 부드러운 눈을 밟으며 삼선교에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넘어 창경원 쪽으로 걷노라니 기분은 상쾌하면서도 깊은 사색에 빠질 만큼 점차 안정되어 갔다. 내 머리 속은 스물일곱 나이답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과 이성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시를 짓는다 해도 다른 소재가 떠오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애정시와 사랑노래는 흔하디흔하고 차고도 넘친다. 내가 경험한 사랑의 감정은 여늬 사랑과 다르고 내가 하고 싶은 사랑도 그런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 내가 쓰는 애정시는 달라야 한다. 베르테르의 편지와도 다르고 나폴레옹의 편지와도 다른 것이어야 한다. 무어라 꼭 집어서 말하긴 어려워도 지극히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정서, 사연이 많고 드라마틱하고 운명적인 사랑! 그런 걸 떠올리려고 발끝만 보고 걷고 있는데 문득 내 오른쪽 오버 주머니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만져보니 추잉 검이 한 통 들어 있었다. 돌아보니 하얀 수건을 쓴 키가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쳐다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하자 "뒷모습이 너무 근중하고 멋져 보여서 드렸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이라 그걸 돌려 주려하자 "어서 가세요."하곤 돌아서버렸다. 나는 그녀가 약간은 내 사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내 상념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발자국 가다가 문득 그 할머니의 순수한 호의에 내가 냉대를 한 것 같아 그 할머니를 찾아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둘러보니 어디로 사라졌는지 사방 하얀 눈밭 위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 창경원 문이 열린 걸 보며 "혹시 껌팔이 할머니?"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끝내 보이질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그녀와의 기이한 만남에 여러 가지 상상과 비유를 보태고 시를 만들어 나갔다. 나는 일단 나와 그녀의 관계를 애인 사이로 둔갑을 시키고 "아득한 옛날 나는 소였고 그녀는 소 등허리에 앉았다 떠난 까치였다가 그녀는 이승에 술집 마담으로 환생하고 나는 손님이 되어 다시 만나는 걸로 바꾸었다. 술집 이름은 취운정이라 했는데 왠지 그 이름이 걸맞을 듯했다. 이듬해 안동의 후배 문인들이 <글밭>이란 문예지를 창간하며 원고를 달라기에 "취운정 마담에게"를 주었다. 그러니 이 작품이 쓰인 것은 1969년 겨울이었고 첫 발표는 1970년이었고 1971년에 <월간문학> 제 7회 신인작품상 공모에 응모한 것이다. 나는 내심 심사위원들이 내가 서른이 채 안 된다는 걸 알면 좀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어느 새벽꿈 속에서나마

나 만난 듯하다는

그대

 

내 열번 전생의

어느 가을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角干 유신庾信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그날

쪽같이 푸르던

하늘빛이라니



5월호에 발표가 났는데 "당선작 없는 가작"이었다. 심사위원 중엔 집안 어른인 김종길 시인이 있었는데 뒷날 들어보니 그가 나를 알아보고 더욱 분발시키기 위해 일부러 당선작 없는 가작을 주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생각대로 이듬해 <시문학>에 6편의 작품을 보냈고 서정주 선생에 의해 한꺼번에 추천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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