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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

「여숙旅宿」「밀어」「시골의 달」

by 답설재 2014. 9. 6.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이 이런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렇지만 결코 그리 깔끔할 것도 없는, 그 시절의 이른바 '무전여행'이란 것의 추억을 멋들어진 시 한 편으로 간직할 수 있는,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추억은 메마르고 저 맥고모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방랑시편 (1) 「여숙旅宿」

 

10월 하순, 오후 4시 경, 박영태와 나는 영덕서 강구로 넘어가는 바닷가 비포장 언덕길을 터덜터덜 힘겹게 걷고 있었다. 땀이 흐르고 숨도 차고, 어디 앉아 쉴 만한 그늘이 없나 하던 차에 길가에 문짝이 떨어져 나간 초가삼칸 폐가가 눈에 띄었다. 그 폐가의 먼지 앉은 냉방에는 누가 배고 간 것인지 모를 목침이 나딩굴고 벽에는 낡은 맥고모자가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처럼 묵묵히 걸리어 있었다. 영태와 나는 서늘한 흙벽에 기대 앉아 문틀 밖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과 오징어잡이 배가 하나 둘 유어등을 밝히는 걸 보며 다시 길을 나섰다. 그때 그 기억으로 나는 '여숙'旅宿이란 시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질풍노도의 고3 시절의 가을 소풍 날, 우리 둘은 따로 땡전 한 푼 없는 무전 여행 길에 뛰어든 것이었다. 학교와 부모에 대한 반발, 갑갑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어딘가로 하염없이 떠나고 싶은 낭만과 모험 욕구가 마치 탈옥수처럼 개고생 길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때 내겐 이미 유럽문학에 자주 나오는 집시와 도보여행, 그리고 우리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가도가도 황톳길"이나 청마의 "이름 없는 사구沙丘에 백골이 되리라", "철벽같은 광야" 같은 문구가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케더린과 헤어진 히스클리프처럼 지독한 실연을 앓고 있던 중이었으니 길거리 노숙이나 감기 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자! 배고프면 남의 밭 무라도 뽑아 먹고 다리 아프면 지나가는 트럭에라도 얹혀서 가는 데까지 가보자. (그러다 보니 어디서 잘못 얻어 먹은 쉰 밥 때문에 식중독에 걸려서 고작 3박4일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영태네 큰 누나가 "내 동생 내놓으라"며 울음보를 터뜨리고 간 덕택에 학교 교무실에 불려 가서 훈방조치를 받는 걸로 우리의 무모한 여행은 끝났다.) 그 후 15년이 지나서야 이 시는 내 첫 시집 "개안"開眼(현대문학사,1974)에 실린 것이다.

 

 

                           낮은 천정엔 이제 막

노숙에서 돌아 온 사나이의

이슬에 젖은 맥고 모자가

묵상默想에 잠긴 듯 걸리어 있고

 

역마驛馬에 쫓기우는 핏대 센 사내들이 배고 간

때묻은 목침이

윗목에 하나.

 

정 뜬 여자의

등살같이 차거운 흙벽에

무너져 앉아

한숨 섞어 내뿜는 담배

파아란 연기……

 

아직은 책장 덮 듯

닫을 수 없는 문 밖으로

눈 들어 흘깃 치어다 보면

까닭 없이 서슬 푸른 하늘은

간수看守인 양 저만치서 기다리고 섰다.

 

('여숙' 전문)

 

 

천벌을 받아서 코카사스 산정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처럼 여기 '서슬 푸른 하늘'은 화자로 하여금 끝없는 유랑의 길을 떠다니게 하는- 절대로 휴식과 안주安住를 용납치 않는 '간수'인 것이었다. 한하운이 말한 "천형죄수"의식이랄까?

이 시의 남성적인 장중함과 운명적 비통은 어디서 온 것일까? 왜 나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패망의 인생을 앞당겨(시대적으론 뒤늦게) 쓴 것일까? 식민지 시대를 산 선배 문인들의 영향, 그리고 그 시대에 풍미했던 "나그네 설움"류의 청승맞은 가요의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문학이 인생사의 온갖 기미를 다 다루는 것이라면 이러한 비극체험도 빠를 수록 좋을 것이다. 낭만과 멋을 읽어 낼 줄 안다면 말이다.

 

 

                <김 시인이 보낸 메일>

 

 

 

시인이었는지 작가였는지, 아니면 화가였는지, 혹은 평론가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용가였는지, 아무래도 알쏭달쏭해서 인터넷에서 찾았더니 '시인'으로 소개된 김영태(1936~2007)는 소묘집 『작가의 초상』(지혜네, 1998) 머리말에서 "세상이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인데, 시인들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잠시라도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원길 시인은 그 며칠 전에도 수채화 같은 이야기 한 편을 보냈었습니다.

 

 

「밀어」와 「시골의 달」

 

시문학 강의 시간이었다. 구용丘庸은 미당未堂의 '밀어 蜜語'를 그 특유의 낮고 가느다란 음성으로 낭독하고는 마치 취하기라도 한듯 멍하니 섰다가 혼잣말처럼 한다는 말이 "이런 시 백 편 만 쓰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 그러곤 그 시를 또 한 번 읽는 것이었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과연 이 시가 그렇게도 좋은 시일까? 처음엔 구용의 찬사 일변도의 해설을 듣고도 실감이 잡히지 않더니 시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구용이 왜 이 시를 극찬하는 지를 알 것 같았다. 이 시의 화자의 마음은 흡사 기독교 성서 중의 어떤 대목과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947년에 발표된 이 '밀어'에도 일제하 절망에 갇혔던 친구들에게 광복의 기쁨과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 않는가! 그 속삭임 속에 인류 구원의 음성을 느끼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렇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미당이 자주 "시인의 랭킹은 성인 다음일세" 하던 걸 보면 더욱 이 시가 써진 마음바탕이 떠오른다.

그로부터 거의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자연과 시골을 떠나 도시화, 산업화시대에 살며 국가부도 등 전대미문의 경제난을 겪으며 또 한번 6,25 못지않은 비참을 맛볼 때 쯤 나는 뜬금없이 "시골의 달"이란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천지에 그대 설움 달래 줄 아무도 없을 때

여기 냇가에 와 밤하늘 둥근 달을 쳐다보아라.

 

여울에 울먹이는 한 점 돌에도

달빛은 어루만지듯 내리고 있다.

 

허영의 거리에서 부나비처럼 허둥대다 죽지가 부러진 그대

매연에 그을린 도회의 달이야

피멍 든 속가슴까지 닿을 수 있나

 

천지에 달 밖엔 그대 보아 줄 아무 것도 없을 때

여기 시골에 와 중천의 고운 달과 마주 보아라.

 

('시골의 달' 전문)

 

 

산업화시대 인간의 허욕에 따른 절망과 고독은 극에 달해 있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의 달'(자연)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달에 대한 최고의 예찬이 담긴 셈이다. 나는 미당의 '밀어'에서처럼 "보아라"를 두번이나 쓴 걸 보면 나도 ' 밀어'를 엄청 좋아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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