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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아침을 닮은 아침」

by 답설재 2013. 9. 26.

아침을 닮은 아침

 

 

박연준

 

 

 

지하철 환승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 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

 

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 없이 서 있는 자

 

모두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환승을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는 소리를 빼앗긴 비처럼

 

비였던

 

비처럼

 

빗금으로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기다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지금을 잊은 게 아닐까

 

우리의 걸음엔 부러진 발목과

 

진실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한 마디쯤 멀리 선 귀신을 뒤로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눈먼 귀신들

 

오늘 아침엔 아무도 서로를 못 본 채

 

모두가 귀신이 되어 사라졌다

 

 

 

 

 

――――――――――――――――――――――――――――――

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나도 '조만간' 귀신이 되어

저런 곳

지하철역, 환승을 위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트 혹은 계단, 승강장 같은 곳을 서성거리게 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이승이 좋아지고

내일부터는 지하철을 탈 때

그렇게 오고가면서 조금 비위가 상한다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지금 저 환승게이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곧 귀신이 된다 아니 귀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귀신과 함께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아니 우리가 이미 귀신일지도 모르는 이 세상이

그런대로 좋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 이 시를 썼구나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는 제목의 시집을 낸 박연준 시인.

 

 

『현대문학』 2013년 3월호,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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