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76 박연준 「파주, 눈사람」 2019.2.15. 파주, 눈사람 박연준 여보, 방에 좀 가봐 방에 눈이 내려요 언제부터? 우리가 잠든 시간부터, 지난해부터, 지지난 봄부터, 당신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친다 눈을 숨기려는 듯이 눈이 쌓이면서 발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고요하고 하염없네? 고요하고 하염없지 눈 쌓인 책상을 지나 눈 덮인 겨울을 지나 눈빛이 꺼진 유령들, 허리를 지나 우리는 침실 스위치 옆에 나란히 서서 두 마리, 사랑에 빠진 눈사람 눈 코 입이 사라지는데 서로 속삭인다 녹지 마세요 녹지 마렴.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가 가고 나면? 죽은 우리 둘이 와서 나란히, 눈 속에 살겠네 ―――――――――――――――――――――――――――――――――――――――――― 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등단... 2019. 4. 6.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신경림 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 2019. 4. 2. 김기림 「바다와 나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현대문학』 2019년 1월호 111~112.1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림. 사랑. 유종호「또 다른 슬픈 천명-바다와 나비의 시인」(에세이)『현대문학』2019년 1월호 110~120. [본문으로] 2019. 2. 21. 「그놈이 그놈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최승호 로봇 군단의 행진 완장 찬 로봇들이 씩씩거리며 걸어간다 무리가 무섭다 무쇠 뺨이 무섭다 엄마야 누나야 술이나 먹자 ―――――――――――――――――――――――――――――――――――――――― 최승호 1954년 춘천 출생. 1977년 『현대시학』 등단... 2019. 1. 28. 문정희 「도끼」 도 끼 문정희 도끼를 잘 쓰는 사내를 사랑한 적이 있다 불끈거리는 그의 팔이 허공을 빠르게 선회한 후 푸른 도끼날로 급소를 내리칠 때 태어나는 번개를 그 눈부신 냉소의 언어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때 뜻밖에 나의 어깨에서 솟아나는 날개 도끼를 잘 쓰는 사내가 사랑하던 날개를 쩡쩡! 솟아나는 깃털을 하나의 리듬으로 시를 쓴 적이 있다 검은 젖을 빠는 입술 아, 덧없는 젖꼭지 일순 도끼로 내려쳐서 얼음 속 빗금에서 불꽃을 꺼내는 야생의 도끼가 내리친 급소의 언어를 번개와 리듬을 깊이 사랑한 적이 있다 ――――――――――――――――――――――――――――――――――――――――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 2019. 1. 14. 황인숙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황인숙 어젯밤 눈 온 거 알아요? 어머, 그랬어요? 아무도 모르더라 토요일 밤인 데다 날도 추운데 누가 다니겠어요 저도 어제는 일찍 들어갔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 우리나 알지 4월인데 눈이 왔네요 처음에는 뭐가 얼굴에 톡 떨어져서 비가 오나 하고 가슴 철렁했는데, 싸락눈이더라구 자정 지나서는 송이송이 커지는 거야 아, 다행이네요 그러게, 비보다는 눈이 낫지 동자동 수녀원 대문 앞 긴 계단 고양이 밥을 놓는 실외기 아래 밥그릇 주위에 졸리팜 곽 네 개 모두 뜯긴 채 흩어져 있었지 빠닥빠닥 블리스터들도 빠짐없이 비어 있었지 졸리팜 가루 같은 싸락눈 쏟아지던 밤이었지 ―――――――――――――――――――――――――――――――――――――――― 황인숙 1958년 서울 출.. 2018. 12. 15. 이제니 「발화연습문장」 발화연습문장―어떤 고요함 속에서 곡예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리는 밤 이제니 제목과 무관한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줄 와서 읽고 한 줄 와서 지운다. 한 줄 와서 지우고 한 줄 와서 쓴다. 누군가 네게로 와서 살았고 너 역시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몸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영혼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밤 오래오래 아무도 모르게 내리던 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잊고 있었던 전생을 이해하듯이 닫힌 입의 숨은 감정을 헤아려본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어떤 고요함 속에서 시작한다. 너는 한밤중 문득 깨어나 곡예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곡예하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로서 너를 사로잡는다. 한계상황으로 너를 밀어넣는다. 곡예는 지난.. 2018. 11. 22. 이규리(시) 「아테네 간다」 아테네 간다 이규리 한밤중 거실에 나오니 마룻바닥에 깔린 달빛 눈부셔 거기 누가 왔나 달빛 내려 퍼지던 아테네의 언덕이 생각나고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연주하던 야니의 피아노가 들리고 먼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를 걱정하며 잠은 다른 잠으로 가고 한밤중 홀로 아테네 간다 그렇지 달빛이었지 달빛 아테네였지 피아노 앞의 그가 흰 소매를 움직일 때마다 신들이 미끄러져 나와 심심하던 그들은 춤을 추었지 파르테논의 기둥을 건반처럼 만지던 법과 생과 사 신들은 신이 났을 것이다 나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저 신들의 나라에 입성하는 거 아이야 공부가 힘들면 잠시 신들의 회의나 엿볼까 그중 아주 평범하고 인자한 신도 있는 거라 꿈이 신탁이 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으나 달빛 요요히 뿌려 광장이 .. 2018. 11. 8. 김지윤(시) 「러시아의 연인들」 러시아의 연인들 김지윤 내일이 되면 돌아온다던 당신이 오지 않아 당신을 찾아 나섭니다. 빨래는 건조대에 널어놓았고 안 쓰는 전자제품의 콘센트도 뽑아놓았습니다. 불 켜진 곳은 없나 집 안을 둘러보는 일 역시 빼놓지 않았습니다. 현관문을 잠그고 길을 걷습니다. 목적지가 없는 걸음은 바닥을 차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바닥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딘가 미련한 구석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선 오래된 연인들이 헤어질 때 예카테린부르크로 간다고 했죠. 등을 맞대고 한 명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또 한 명은 모스크바로. 그렇게 서로를 뒤로한 채 걷다 보면 다시 한 번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죠. 아무리 걸어도 길이 끝나지 않으니 나는 난감합니다. 당신과 함께 걷던 길들이 어디선가 흘러.. 2018. 11. 2. 「개구리 남편」 개구리 남편 김상혁 여자는 남편이 지나치게 빨리 말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낀다. 언제나 그는 예상보다 빨랐다. 더위도 추위도 그의 빠른 걸음을 붙잡지 못한다. 그래서 말 붙이기 어려웠다. 수박…… 하고 말을 꺼내면, 남편은 재빨리 그 말을 가로채, 아! 수박이 먹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지금 나가서 한 통 사 오는 게 좋겠어, 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여름…… 하면, 맞아, 이번 여름은 정말 덥지…… 하지만 앞으론 더욱 더워진다더군,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 둘째를 가지는 것에 관하여 여자가 생각하고 있을 때. 남편이 재빨리 다가와 말했다. 혹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거야, 당신? 그렇게 근사하고 멋진 생각에 말이야. 그래도 제일 무서운 건 잠든 남편이다. 아주 작은 기척에도 그는 상체.. 2018. 10. 20. 이장근(동시) 「시키지도 않은 일」 시키지도 않은 일 이장근(1971~ ) 엄마 아빠 싸우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신발 정리 신발 앞코 집 밖으로 향한 걸 찾아 집 안쪽으로 돌려놓았다 시집 《파울볼은 없다》(창비교육) 중 《한국경제》 2018.4.9. 〈이 아침의 시〉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40868561 2018. 10. 10. 「푸른 양 한 마리」 푸른 양 한 마리 김 형 술 춤을 추듯 가볍게 바위 절벽을 뛰어오른다. 한 점 망설임 없이 폭설을 가로지른다. 허공에서 자고 허공에서 꿈꾸고 허공에서 맞는 날카로운 새벽, 두려움으로는 허공을 건널 수 없다. 절박한 목숨만이 허공을 건너는 건 아니다. 그저 평온한 무심 하나로 허공에 .. 2018. 10. 2.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