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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황유원 「아르보 패르트 센터」 아르보 패르트 센터 황유원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센터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 2021. 8. 20.
「특선 다큐멘터리」 특선 다큐멘터리 이소호 나는 전기장판 위에서 낮잠만 자는 수사자 한 마리를 혐오했다. 그깟 수염 좀 많은 게 뭐 대수라고 매 끼니마다 소 돼지를 해 다 먹였다 버는 것 없이 쓸 줄만 알았던 남편은 부른 배를 부여잡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생로병사의 비밀」의 볼륨을 높여가며, 오래오래 사는 법을 강구했다 여보 내일은 가젤 데신 뱀을 잡는 게 좋겠어 그게 그렇게 정력에 좋다더구먼 밤일도 사냥도 못 하는 남편 저 혼자 평화로웠다 한편 오늘도 골방의 토끼 새끼들은 글로버만 주워 먹으며 배고픔에 허덕였다 사계절 내내 양푼에 클로버를 비벼 먹다가 빨개진 눈을 부비며 물었다 엄마 우리에게 행운은 언제 오나요 아버지가 좋은 이파리만 골라 먹어버렸단다 토끼 새끼들은 눈이 더욱더 빨개졌다 풀독에 오른 자식새끼들은 점점 매가.. 2021. 8. 14.
김경미 「꽃 지는 날엔」 꽃 지는 날엔 김경미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20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20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 2021. 8. 10.
송승언 「하나코 이야기」 하나코 이야기 송승언 시로가와마을의 연못에는 하나코라는 비단잉어가 살았습니다. 하나코는 1751년 모월 모일에 태어나 1977년 7월 17일까지 연못 세계에 머물렀습니다. 그 좁은 세상에서 200년을 넘게 살다 간 것이지요. 보통의 잉어들은 스무 해 정도를 살다 간다고 하니, 참 오래도 살았네요. 잉어에게 사회가 있다면 몇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네요. 사진 속 하나코의 형상은 마치 붉은 비단결 위에 투명한 빛 한 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진 속에는, 그를 마지막으로 돌보았다는 고시하라 고메이 박사로 생각되는 노인이 쪼그려 앉아 당신 손으로 직접 하나코에게 밥을 먹이고 있습니다. 잉어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탓에 만들어진 동심원은 시간을 잊은 듯 영원히 번집니다. * 하나코의 생애는 .. 2021. 8. 4.
박남원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2021 거의 다 읽어 「죽림정사」「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두 편만 남은 걸 보자 가슴이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다 읽었네' '끝나버렸네' '이젠 뭘 해야 하지?' 건성으로 읽는다면 몇 페이지 되지 않아서 잠깐이겠지만 모처럼 혼이 빠져 있었다. 대서사시의 막이 내리는 느낌...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언젠가 나 죽어 내 영별식永別式장에는 굳이 바쁘신데 오실 일 없으시네. 살아 내내 외로움으로 지내는 동안 언제부턴가 외로움에 터를 잡게 되면서 마음 편히도 그렇게 살게 되었으니 마지막 외로움도 실은 해탈로 가는 한 길목 아닌가. 나 그간 잊고 지내던 이승의 노래 한 소절 목질의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 2021. 7. 13.
이원석 「미인」 미 인  이원석  계속 저어주세요 쉬지 말고 그를 저어주세요 기름이 굳어지지 않도록 국자로 젓느라 땀이 뚝뚝 떨어지네요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벽면을 긁어내듯 저어주세요 이따금 우러나는 걸쭉한 핏물은 체로 건져내야죠 뽀얀 거품 사이로 떠오르는 한 손이 당신 손등을 쓸어주네요 그래도 계속 저어줘야죠 바닥까지 휘젓다 그의 흉곽에 국자가 닿네요 살점이 풀어지도록 그를 짓이겨주세요 그의 입술에 묵은 숨결이 매달리네요 그런 건 부드럽게 건져주세요 그가 깊이 우러나도록 연골까지 하나하나 해어뜨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저어주세요 그의 눈물은 건져주세요 그의 번민도 건져주세요 그의 미래도 그의 두려움도 그의 희망과 그의 고요도 건져주세요 분노를 끌어내리는 슬픔은 해어뜨려주세요 맥없이 가라앉는 표정들은 녹여주세요 자맥질하는.. 2021. 7. 10.
류병숙 《모퉁이가 펴 주었다》 《모퉁이가 펴 주었다》 류병숙 동시 │ 신문희 그림 청색종이 2021 항구 우리 집 현관은 밤마다 조그만 항구 발 실어 나르는 배 신발들이 잠을 자지요. 통통배 보트 고기잡이 배 아침이면 건너야 할 넓은 바다를 두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나 또 하나 결혼해서 떠나갈 땐 허전했습니다. 아내 몰래 신발장 앞에서도 먹먹해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서 이 시를 읽는 동안 또 그 허전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밤에는 기적 같은 걸 느꼈습니다. 이 넓은 세상으로 그렇게 나갔다가 어김없이 들어오곤 했거든요. 지금은 그 항구가 허전합니다. 출항도 뜸하고 따라서 귀항도 뜸합니다 허전한 항구......... .. 2021. 7. 7.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박두순 벌은 원래 육식이었다네 1억 5천만 년 전엔 파리 진딧물 나비 거미를 잡아먹는 육식이었다네 공룡이 들끓어 좁아진 육식의 자리 견디지 못해 육식을 그만 포기했다네 꽃가루받이 택배 대가로 꿀을 얻어다 새끼를 길렀다네 그게 편해 채식주의로 바꾸었다네 그보다 채식주의자가 된 다른 이유가 있었다네 꽃을 사랑했다네, 아주 열심히 채식주의자가 된 진짜 원인은 그것도 아니라네 꽃 몰래 향기를 훔쳐가는 거라네. * 조선일보 2021년 3월 20일 자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임. 《시와 소금》 vol.38 여름호에서 시인은 아무래도 종이 다릅니다. 정년퇴임하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꿀벌 치는 거나 배워두었더라면...' 했던 일이 생각나고 시청 방향 왼쪽으로 보이는 절 입구 산비탈에서 벌을 치기 시.. 2021. 6. 10.
김성민 「토끼풀 시계」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 "이 동시 어때요?(토론)' 코너에 실려 있는 동시입니다.  토끼풀 시계 ㅣ 김성민  토끼야, 몇 시니?토끼풀 시계 차고오물오물 시간 읽던 토끼가 말해요여긴 다 고장 난 시간뿐이야맞는 시계가 하나도 없어   이 동시를 보고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치 내 집 시계들 같습니다.'협찬'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 일 저 일로 말하자면 공짜로 굴러들어 온 시계들인데시간도 제멋대로입니다.5분 빠른 것도 있고 5분 느린 녀석도 있으니 그 차이가 10분이나 됩니다.그렇지만 나는 그 시계들이 각자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그것들은 그러니까 제각기 열심입니다.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저 자신 같아서 측은할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빠르거나 늦거나 다 맞다고 해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저 동시에.. 2021. 5. 24.
「손바닥 편지」 손바닥 편지 / 이화주 "어제 집에 가서 숙제 안하고 뭐 했니?" "원교 엄마가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녁에는 뭐 했니?" "아빠랑 개구리 구워 먹었어요."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자꾸 자꾸 미안해서 살며시 다가가 선생님 손바닥에 편지를 썼다. 우리 선생님 방긋 웃으시더니 내 손바닥에도 간질간질 답장을 써 주셨다. '선생님도 너 좋아해.' 나무늘보라는 분이 설목의 카페《오늘의 동시문학》(2021.5.15)에 소개한 동시입니다. 이화주 동시집 《손바닥 편지》(아동문예, 2005)의 표제작입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사라진 세월입니다. 2021. 5. 18.
김동원 「나비 수첩」 나비 수첩 / 김동원 나비 수첩에는 장미꽃을 갈아 어떻게 빙수를 해 먹는지 적혀 있었네 붉은 노을 몇 방울 얼음 위에 뿌려라 간밤 잘라 놓은 초승달 체리랑 망고랑 수박이랑 함께 올려라 숟가락은 오목한 바람을 두 개 포개라 종달새 입으로 퍼먹어라 분홍 장미 향기가 나폴나폴 나비 되어 날아갈 때까지 자꾸자꾸 퍼먹어라 ........................................................ * 2017년 등단 아이들은 이렇게 놀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렇게 놀면 안 된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놀아야 한다고 우겨서 기를 꺾어 놓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오류를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아이들 세계에 다가가.. 2021. 5. 12.
김건영 「트리피드의 날」 트리피드의 날* 김건영 동물원에 가자 했지요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 미안하지만 보러 가지 않는 것도 미안하다 했어요 우리 수족관에도 가고 식물원에도 가요 멀리서 저녁 식사의 메뉴를 묻는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닙니다 뭐라도 묻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진실해질까 무섭다 하늘에는 관찰자의 눈알들이 선명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죠 따뜻해지는 벽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바닥만 따뜻해지는지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느라 힘이 들고 진실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화를 내고 밤이 언제나 온다 꿈속에 뿌리를 내리고 말해야지 아무렇게나 말해야지 선량한 사람들이 꿈속까지 쫓아올 때가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남의 슬픔을 이렇게 기쁘게 읽어도 되는가 걸어 다니는 식물처럼 눈을 껌뻑인다 타인의 슬픔으로.. 2021.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