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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류병숙 《모퉁이가 펴 주었다》

by 답설재 2021. 7. 7.

《모퉁이가 펴 주었다》

  류병숙 동시 │ 신문희 그림

  청색종이 2021

 

 

 

 

 

항구

 

 

우리 집 현관은

밤마다

조그만 항구

 

발 실어 나르는 배

신발들이

잠을 자지요.

 

통통배

보트

고기잡이 배

 

아침이면

건너야 할

넓은 바다를 두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나 또 하나 결혼해서 떠나갈 땐 허전했습니다. 아내 몰래 신발장 앞에서도 먹먹해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서 이 시를 읽는 동안 또 그 허전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밤에는 기적 같은 걸 느꼈습니다.
이 넓은 세상으로 그렇게 나갔다가 어김없이 들어오곤 했거든요.
지금은 그 항구가 허전합니다.
출항도 뜸하고 따라서 귀항도 뜸합니다
허전한 항구.........

 

물론 이 댓글은 썰렁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동시를 뭐 이렇게 감상해 놓았나?'

나는 그게 싫습니다.

동시를 왜 유치하게 감상해야 하는지 일부러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걸 생각하면 너무 너무 답답합니다.

그러니까 동시는 동시 대접 혹은 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건 유치원 애들이나 읽는 거지' 하고 외면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직도 그따위 글을 써놓고 동시라고 하는 작자들(늙은이들)이 그 계통에서 대가(大家) 대우를 받는 걸 보면 기가 막히고 짜증이 납니다.

 

어떻게?

자신이 무슨 유아인 양 진짜 유아는 그렇게 하지도 않는 말놀이!

(류병숙 시인은, 그런 '잡문'은 쓰지 않겠다고 '상자에 몸 넣기가 아닌 시 쓰기'라는 글을 이 시집 머리말로 써놓았습니다.)

꽃과 나비, 벌들이나 날아다니는 풀밭 같은 이야기...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거나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더라는 이야기...

그런 말놀이라면 하룻저녁에 열 편은 쓸 것 같은 짧은 글...

 

 

 

걸어가는 신호등

 

 

누나 손잡고

막대사탕 빨며

학교 가는 서준이

 

건널목 건너며

사탕 든 손 치켜든다

 

─ 야, 막대사탕 신호등이다

버스도 서고

자동차도 서고

 

달콤한 아침이다.

 

 

나는 이 시를 읽고 허구한 날 학교나 관청으로 출근하던 교사 시절의 그 아침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치 조금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찾아서 출근을 해야 할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적색 등, 황색 등, 녹색 등 대신 등장한 저 막대사탕, 그 막대사탕을 든 그 아이를 만나러 나가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겸손한 900원

 

 

마트에서

비스킷 한 봉, 900원

참외 한 봉, 4900원

 

물건 값 끝자리가

이것도 900원, 저것도 900원

 

100원을 덜 받아

겸손한 900원.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물건값으로 900원을 매겨 놓은 걸 볼 때마다 가게 주인을 약아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이렇게 보는 것이구나 했고, 지금이라도 총체적으로 변신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웃음 외식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이모

맛있는 웃음 받아온다.

 

카자흐스탄 아줌마는 아침미다

─ 생선(선생)님, 안녕하세요?

태국 아줌마는 헤어질 때

─ 선생님, 관광(건강)하세요

일본 아줌마는

─ 어제 코엑스 해물관(수족관) 다녀왔어요.

 

일주일에 두 번

맛깔난 웃음 외식하는

우리 식구.

 

 

나도 사실은 어느 도서관 다문화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해볼까 싶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구경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찾아간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했다는 카자흐스탄 새댁이 "우리나라(카자흐스탄)에서는 중학생 때까진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지 않아요" 하는 얘기를 듣고 '쑥스러워서'(내가 우리나라 교육 책임자는 아니지만) 봉사활동 같은 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그녀들과 어울려 지냈다면 나도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인데...

 

 

 

손톱깎기의 식사

 

 

먹지는 않고

 

─ 퉤

   퉤

 

뱉기만 한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Poil de Carotte)"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 발랄한, 어른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있지만 그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로부터는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 나는 잠시 이 동시는 그 아이가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그만 마쳐야 하겠습니다.

이 시인은 아무래도 뭐든 재미있게 보이도록 하는, 뭐든 아름답게 보여서 우리가 함께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보이도록 하는, 눈에 띄는 건 뭐든 시가 되게 하는 함수기(函數機)를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류병숙 시인님!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댁에 동시 나오는 함수기가 있지요? 뭐든 집어넣기만 하면 출구로 동시가 한 편씩 툭! 툭! 튀어나오는 함수기. 교훈 같은, 같잖은 얘긴 하지 않겠습니다. 교훈을 앞세우는 작품치고 오래가는 꼴을 볼 수 없었거든요. 어쨌든 다른 시인들은 대부분 이런 동시를 쓰지 않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본래부터 시가 되기 쉬운 것들을 '이거다!' 하고 시로 나타내는데 이 시집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말하자면 동시가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소재들이 더 재미있게, 더 아름답게 시가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거든요? 한두 편도 아니고 대략 이 시집의 2/3 정도는 그런 시들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그래서 좋아'는 대표적인 예가 되겠네요. 이래도, 이런 증거를 들이대는데도 그런 함수기 같은 건 구경도 못했다고 우기실 건가요?"

 

 

 

그래서 좋아

 

 

카카오*에게

매뉴얼에 없는 걸 물어봐야지

 

─ 헤이 카카오, 가족은 몇이니?

─ 잘 모르겠어요

 

─ 몸에 벌레 붙었네, 약 뿌려줘?

─ 말이 너무 어려워요

 

─ 거짓말한 적 있니?

─ 이해할 수 없어요

 

모르고 어렵고 이해 못하고

나도 그럴 때 많거든

솔직한 네가 그래서 좋아.

 

 

* 카카오: 인공지능 스피커

 

 

 

▩ 여담 1 : 설목(雪木) 박두순 시인은 정녕 행복한 분입니다. 부럽습니다.

▩ 여담 2 : 책이 아주 가볍고 잉크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선물 같아서 몇 번이나 책갈피에 얼굴을 묻어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책(유일했던 책 '교과서')을 받았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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