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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건영 「트리피드의 날」

by 답설재 2021. 4. 15.

 

 

 

트리피드의 날*

 

 

김건영

 

 

동물원에 가자 했지요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 미안하지만 보러 가지 않는 것도 미안하다 했어요 우리 수족관에도 가고 식물원에도 가요 멀리서 저녁 식사의 메뉴를 묻는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닙니다 뭐라도 묻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진실해질까 무섭다 하늘에는 관찰자의 눈알들이 선명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죠 따뜻해지는 벽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바닥만 따뜻해지는지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느라 힘이 들고 진실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화를 내고 밤이 언제나 온다 꿈속에 뿌리를 내리고 말해야지 아무렇게나 말해야지 선량한 사람들이 꿈속까지 쫓아올 때가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남의 슬픔을 이렇게 기쁘게 읽어도 되는가 걸어 다니는 식물처럼 눈을 껌뻑인다 타인의 슬픔으로 기꺼이 연명하자 다들 그러더라 괴물도 못 된 고물들이 걸어 다닌다 몸속에서 화분과 분노를 기르고 있다

 

아버지는 너무 많이 참았죠 아버지의 바깥에서 나는 자랐고 안쪽에서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 나의 안쪽에서 아버지가 자라고 있다 때로 던질 말이 없어서 화분의 안부를 물었죠 술을 마시고 희망보다는 하몽이 삶에 유익하다고 뜨거운 물과 한 줌의 커피로 어둠을 기른다 물을 줘야지 씻고 마시고 식물은 한밤중을 걸어가고 화분만 남는다 길러야지

 

 

 

* 영국의 작가 존 윈덤(1903-1969)의 공상과학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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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1982년 광주 출생. 2016년 『현대시』등단. 시집 『파이』. 〈박인환문학상〉수상.

 

 

『現代文學』 2020년 2월호 150~151.

 

 

지난해 늦겨울 아니면 초봄 이 시를 읽고(『現代文學』2020년 2월호) 훌쩍 혹은 겨우 한 해가 지난 것인데, 그 트리피드의 날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고 차츰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자주 을씨년스럽게 한다.

김건영 시인은 이 시 이후에 뭘 하고 있을까?

'나머지 일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런 날이 오려고 한다면 나는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할까, 가질 수 있을까?

시인은 어떤 생각을 준비하고 있을까? 나몰라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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