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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 언 「컵 하나의 슬픔」

by 답설재 2021. 4. 6.

 

 

 

컵 하나의 슬픔

 

 

김 언

 

 

컵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컵 하나의 슬픔이 보인다. 보이다가 안 보이는 슬픔도 보인다. 슬픔은 담겨 있다. 컵 하나가 있으면 컵을 둘러싸고 맺히는 물방울도 슬픔의 모양으로 둥글고 슬픔의 자세로 흘러내리고 슬픔의 말로가 되어 말라가는데 말라붙는데 컵 하나는 덩그러니 컵 하나는 엉뚱하게 컵 하나는 재질과 상관없이 컵 하나의 모양과 자세와 성정까지 다 담아서 슬픔의 기둥으로 슬픔의 웅덩이로 슬픔의 틀린 말로 슬픔의 그릇된 호명으로 계속해서 네 네 대답하는 슬픔의 자동 응답기처럼 컵이 있다. 하나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어도 컵은 컵이고 슬픔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싶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슬픔을 한 잔 따르고 두 잔 따르고 세 잔째는 이미 폭탄처럼 이것저것 다 들어가서 어지러움을 동반하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컵 하나의 용도는 계속 슬픈 것. 계속 슬프라고 서 있는 것. 아니면 진작에 쓰러졌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서 있겠는가. 비우자고 서 있다. 계속 따르라고 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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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언  1973년 부산 출생. 1998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숨 쉬는 무덤』『거인』『소설을 쓰자』『모두가 움직인다』『한 문장』『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미당문학상〉〈박인환문학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21년 3월호.

 

 

 

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책을 기다린다.

출판사에서 시인에게 시 한 편 보내달라고 했을 것이고 시인이 「컵 하나의 슬픔」을 보냈을 것인데 나는 마치 내가 이 시를 창조해낸 것처럼 즐거워한다.

슬프다는데 즐거워하다니?

시인이 컵을 보며 슬퍼하는 건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이니 어쩌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 대신 시인이 슬퍼해주는 것이니, 함께 슬퍼해주는 것이니, 살아가는 건 거의 다 그렇다고 위로해주는 것이니, 내가 내내 슬퍼하다가 잠시 조금 즐거워해도 좋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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