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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풀 잡기」

by 답설재 2021. 3. 9.

2019.5.17.

 

 

 

풀 잡기 / 박성우(1971~ )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밭 녹차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어깨 허리 무릎, 온몸이 쑤시게 틈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저짝 몰리던 풀이 여름이 되면서, 되레 나를 몬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한테 몰린 나는

고추밭 파밭 도라지밭 녹차밭 뒷마당까지도 풀에게 깡그리 내주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10년이 다 되어 간다. 장석남 시인이 소개한 이 시를 보고* 고성에서 농사를 짓는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를 생각했다. 그분이 블로그 《현강재》에 실어놓은 "잡초와의 전쟁"이 생각난 것이다.

 

 

잡초와의 전쟁

 

 

작은 규모이지만 농사를 시작한 후 가장 큰 어려움이 잡초라는 희대의 난적(難敵)과의 싸움이다. 잡초가 제일 맹위를 떨치는 요즈음 여름 한철에는 적어도 하루 대여섯 시간은 잡초 뽑는데 시간을 보낸다. 오랜 가뭄 뒤에 비가 오면 반갑기 그지없으나, 비 온 후에 더 기승을 부릴 잡초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와 씨름하다 보면, 내가 이 짓을 하려고 이곳에 왔나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다. 그런데 2, 3일만 소홀히 해도 농토가 온통 잡초 천지이니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힘겨루기가 일상사가 되었다.

 

(중략)

 

잡초와의 전쟁을 벌리면서 몇 가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너무 상식적인 얘기지만, 세상만사의 해답은 다 그런 게 아닌가.

첫째는 인내와 끈기로 임하자.

잡초제거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면 힘들지만 그런대로 해 볼만 한 싸움이다. 방심과 게으름, 미루기는 금물이다. 매일 전사(戰士)처럼 결의에 찬 모습으로 싸움터로 나가자. 그리고 잡초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전에 선제공격하자. 매일 하는 것,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어학공부의 왕도라는 얘기는 여기도 그대로 통한다.

둘째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농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잡초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왕 해야 할 것이면 즐겁게 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생각과 마음을 즐겁게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이다.

 

그러나 요즈음 내가 즐겨 쓰는 방식은 일하러 나갈 때 화두(話頭) 처럼 한 가지씩 ‘생각할 거리’나 ‘추억거리’ 를 머리에 담고 나서는 것이다. 비교적 크게 부담 없는, 그러면서 흥미 있는 주제 하나를 갖고 나서면 일하는 동안 즐겁게 머리를 가동시킬 수 있다. 자유롭고, 여유롭게, 그리고 스스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사두’(思頭)에 다각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궁구(窮究)가 필요한 무거운 주제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도 부담스러우면, 과거의 재미있는 추억거리 하나를 챙겨갖고 나서도 좋다. ‘부산 피난시절’도 좋고, ‘유학시절 친구 Hans' 도 좋다. 그러면 일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된다.

 

(후략)

 

 

이런 글을 쓴 그분에게 "잡초도 살아가려고 태어난 생명"이라고 하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것들을 제거해버리는 땅에는 아무리 끈질긴 잡초라 해도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면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분의 대답을 들을 수나 있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잡초는 농부의 적일지 모르지만 잡초니까 일단 끈질겨야만 잡초다울 것이다.

 

이번에는 입장을 바꾸어 내가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실전(實戰)에 나서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안병영 전 부총리처럼 매일 아침 일전불사의 각오로 그들을 맞이하게 될까, 아니면 저 시인처럼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몰게 될까?

올봄에 당장 나도 그 실전에 나서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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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2.10.31「가슴으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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