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설목은 《오늘의 동시문학》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계간이니까 47호라면 대략 12년인데 그런 책을 사보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십수 년 책을 냈으니, 그것도 재단 같은 걸 만들어 어디서 보조도 받고 공사 간 찬조도 받고 하지 않고 거의 사비로 그 짓을 했으니 요즘 말론 미친 짓이었겠지요.
그러면서 2015년 봄·여름 호가 마지막이었지요, 아마?
지금은 폐간되고 인터넷 카페("오늘의 동시문학")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카페에 들어가 봅니다.
무슨 낙으로 그러는지, 평생 동시를 쓰고 읽으며 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동시)을 나는 웬만하면 "좋다"고 합니다.
'좋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학교 나갈 때)도 아이들에게 웬만하면 "좋다"고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걸 뭐 하려고 미주알 고주알 하겠습니까?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가 뭘 안다고 비난하고 비판하겠습니까?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잘 알 수가 없으므로 웬만하면 "좋다"고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 가보면 몇몇 인간이 나서서
"이건 좋은 동시다"
"이건 동시가 아니다"
"이런 표현은 어쩌고 저쩌고..."
(심지어) "이건 아이들 정서에 맞지 않는다"
별별 소리를 해댑니다.
아이들 정서?
아이들 정서가 어떤 것인지, 누가 그리 잘 압니까?
아이들 정서가 얼마나 복잡한 건지 알기나 합니까?
아이들이 어른보다 단순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까?
천만에!!!
누가 나하고 내기 한번 할까요?
진 사람은 평생 아이들에 대해 입 닥치기로 하고 내기해 볼까요?
동시에 대해서는?
아이들을 잘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동시를 잘 안답니까?
내가 보기엔 멀쩡한 동시들입니다.
아니, 동시라고 해서 다 저희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아니, 어떤 시가 동시이고 동시 아닌 건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꼬치꼬치 늘어놓는 시간에 그런 동시 한 편 더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좋은 동시를 가리는 일을 하는 건 그렇다 치고 동시인지, 동시가 아닌지를 왜 그렇게 따져야 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건 독자인 저 아이들이나 우리에게 맡겨도 좋은 일 아닙니까?
나 참 치사하고 아니꼬와서 원......
그런 '동시인'(이런 말도 있을까요?)이 있다면 인품이 훌륭하다 해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괜히 열을 올렸네요. ㅎ~
여기까지 써내려 왔더니 가슴이 벌렁대네요.
저 위의 저 시 '섭이가 지각한 이유'를 나는 그때 저렇게 예쁘게 옮겨 써놓았습니다.
저 시를 보면 또 어떤 인간은 "이건 아이들 정서로 쓴 시가 아니다!" 뭐 어쩌고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정서에서 쓰는 시는 아이들이 쓰는 것이고, 어른은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나처럼 자꾸 아이의 정서로 되돌아가 보고 싶어 하는, 어른인 것 같기도 하고 아이 같기도 한 인간에게 보여주고 싶은 동시도 있을 것입니다.
'섭이가 지각한 이유'를 읽고 아이들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으려면 저런 동시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그리운 2015년 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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