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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지혜 「초록의 검은 비」

by 답설재 2022. 5. 17.

초록의 검은 비

 

 

박지혜

 

 

그가 죽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온종일 울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려면 이제부터 다른 문을 찾아야 한다

 

원을 그린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를 기다린다

 

그가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가 행복한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착하게 밥을 먹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가 달개비꽃을 보고 소년처럼 기뻐한다 그가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작은 종을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그가 흔드는 종소리처럼 불안하다 나는 그처럼 한 번 두 번 종을 흔든다

 

종소리는 굳은 표정처럼 외로운 온기처럼 슬프다

 

그는 비에 젖은 풀 냄새다 그는 홀로 언덕에 앉아 있는 마음이다 그는 텅 빈 눈빛이다 그는 제비꽃에 앉은 햇빛이다 그는 흰빛이다 그는 해바라기다 그는 한여름이다 그는 수평선이다 그는 머나먼 물고기다

 

모서리에 물을 주며 그를 기다린다

 

나는 그처럼 책장 앞에서 책을 넘긴다 나는 그처럼 안경을 벗는다 나는 그처럼 부엌에서 등을 구부리고 서 있다 나는 그처럼 엄마 엄마를 부른다 나는 그처럼 절룩절룩 산보를 한다 나는 그처럼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그처럼 달린다

 

여기저기에서 나는 그처럼 있다

 

그가 보고 싶다 그가 너무 보고 싶은데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이렇게 결정적인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를 보려면 슬픔의 끝으로 끝없이 슬픔의 끝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빠, 어떻게 해야 해?

이렇게 결정적인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해?

 

그의 모자를 쓰고 그의 안경을 쓰고 그의 나무 앞으로 간다

 

슬픔에 슬픔을 더하는 슬픔을 느끼며

먹먹함에 먹먹함을 더하는 먹먹함을 느끼며

환한 웃음에 환한 웃음을 더하는 그를 느끼며

 

기억은 그가 심어 놓은 사철나무처럼 쑥쑥 자라난다 자라나는 기억은 슬픔의 끝을 향한다

 

그가 어딘가로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그치지 않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부르는 것 같은 노래를 노래를 부르는 내내 아름다운 그가 있을 것이다

 

그는 달리는 풍경이 된다 그는 되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그는 희미한 떨림이 된다 그는 불가능한 사랑이 된다

 

초록으로 바탕을 칠한다 검은 비를 그린다

 

초록의 검은 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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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혜  1970년 서울 출생. 2010년 『시와반시』 등단.

   

 

 

 

 

2012년 6월호『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읽었으니 다음 달이면 꼭 10년이 됩니다.

그때만 해도 괜찮은 시절이었지만 나는 인간세계에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시에서는 살아 남은 여성이 소년 같았던 그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게 누구이면 어떻겠습니까?

이럴 것이다 생각하며 읽고 또 읽은 것인데 그렇게 죽을 것 같아 하면서 또 10년을 살았습니다.

그간에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또 10년을 버티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초록의 검은 비」

좋은 시 읽고 이따위 이야기를 해서 시인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