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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강기원 「코끼리」

by 답설재 2022. 4. 28.

코끼리

 

 

강기원

 

 

오늘도 그녀는 위층 남자의 소변 소리에 잠을 깬다. 새벽 여섯 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는 오늘도 건재하시다. 누런 오줌줄기가 튀어 이마를 때리는 듯하다. 아니, 그가 뿜어내는 정액을 뒤집어쓴 듯하다. 묘한 모멸감 속에 그녀는 침상에 그대로 누운 채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를 상상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긴 코를 새벽마다 사납게 휘두르는 코끼리. 어느 날 서커스장의 코끼리가 공연 도중 무대를 가로질러 도망갔다지. 의식 있는 코끼리라며 박수를 보냈었지. 추격 끝에 잡히고 만 코끼리가 위층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러고 보니 쿵쿵 울려오는 발소리마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녀는 코끼리 발밑에 깔린 채 숨 쉬고 밥 먹고 잠든 것이다. 알 수 없는 두통과 가슴의 짓눌림도 그 때문인 것이다. 희부윰히 날이 밝아온다. 묵직한 머리를 겨우 일으켜 진흙 같은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메운 그녀. 코끼리가 그렇듯 그녀 또한 하루빨리 이 수렁 같은 원룸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상상 속의 코끼리를 마주한다. 일찍이 코끼리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저리 깊고 서늘하고 아름답게 무심한 눈이라니, 그 사이 성기처럼 늘어뜨린 코라니…… 조련사도 없이 또 다른 서커스장을 향해 느린 발걸음 떼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게야" 뻑뻑한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서자 어제와 다르지 않은 끈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비닐처럼 얼굴에 들러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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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1957년 서울 출생. 1997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김수영문학상> 수상.

 

 

 

 

우리 아파트에 상주하는 여인

 

 

월간『현대문학』 2012년 3월호에서 이 시를 본 지 십 년이 지났네?

 

이렇게 리얼한 얘기가 있나!

'그녀'가 사는 아파트 위층에 코끼리가 산다면("저리 깊고 서늘하고 아름답게 무심한 눈"을 가진 코끼리, 그 깊고 서늘하고 아름답게 무심한 두 눈 사이에 "성기처럼 늘어뜨린 코"를 가진 코끼리) 우리 아파트 위층에는 무슨 다람쥐 같은, 혹은 평소에는 옷 속에 날개를 숨긴 요정이 살고 있을지 모르지 않나?

 

어제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괜히 곧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척하던 그 젊은 여성이 그 다람쥐 아닐까?

점잖은 척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지만 집에 들어가자마자 "몰랐지?" 쪼르르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다람쥐가 아닐까?

그럼 이 아파트도, 내가 그동안 모르고 지내서 그렇지 얼마나 신비로운 동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