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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by 답설재 2022. 6. 27.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시선사 2022

 

 

 

 

 

-김수환 추기경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힘들고 어려운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라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인터뷰하며 말했다.

 

평생 걸었지만

그길 도달하지 못했다며

쓸쓸한 표정도 슬쩍 지어보였다.

 

 

나는 이 시집의 88편의 시를 한꺼번에 읽었다.

미안했다.

"시를 그렇게 읽나? 그렇게 배웠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여기저기 다시 살펴보는 사이 그런 비난이 들려오는 듯했다.

소설이나 수필 같으면 며칠 혹은 몇 달 길어봤자 대개 몇 년 만에 쓰는 것이겠지만, 시는 그렇지 않아서 수십 년간 썼을 걸 생각하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그 미안함이 몰려와서 '내가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읽었지?' 싶었다.

 

 

혁명으로

 

 

누군가의 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런데 잎과 꽃은

그 색깔로 피고

그 향기로 섰고

열매도 그 모양으로 맺었다

 

누군가의 혁명으로

세상은 바뀌었다고 하는데.

 

 

건망증

 

나의 건망증은 심하고 심하다

인생이 짧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라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내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세월을 아껴 써야 한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읽다 보니까 다 읽었다.

짤막한 시 속에 이야기가 숨어 있다가 읽은 순간, 마지막 행을 읽고 나면 구름처럼 피어올라서 "그래! 맞아!" 하게 되고 '다음 시는?' '다음 시는?' 하다가 끝에 이르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가 쓴 《상상력 사전》도 그렇게 읽었었다. 600페이지도 넘는 그 사전(?)의 항목들을 나는 혼자 잔치하듯 읽었었다.

나는 이 시집을 그렇게 읽었다.

혼자서 잔치하듯?

그렇기도 하고 내내 시인과 대화를 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세상만사, 세상만물을 보는 시인의 눈이 좋고 곱고 매섭고 두렵고 재미있고 허허롭고, 거기에 나의 생각, 나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

 

이 시집을 다 읽었지만 시인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다시 시집을 펼치면 당장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