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나의 독자 "따뜻한" 따뜻한 2022.07.04 21:06 얼마 만에 온 걸까요. 십 년도 넘었나 봅니다. 그 시절의 제 목소리는 제법 날이 서 있고, 결기도 느껴집니다. 젊은 제가 나이 든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 힘으로 오늘 1학기 말 교육과정 평가회 3회 차 중에서 첫 날을 이끌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학교교육과정에 대한 그 시절 그 생각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셈입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제 생각이 논리와 명분이 제대로 담긴 글과 실천으로 펼쳐진 이곳이 참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존경스럽고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분발했고,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 말이 남아있는 이 블로그에 오래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선생님의 최근 글을 읽습니다. 쓸쓸합니다. 거.. 2022. 7. 5.
답설재(踏雪齋)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웠던 날들을 떠올렸습니다. 'Spiegel im Spiegel' 'Für Anna Maria'를 또 들었습니다. 슈베르트도 들었고, 나는 많이 변하지 않았고, 옛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성희와 준엽에게 고마워했습니다. 2020년 겨울까지 나는 많이 달라지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거울 속의 거울' 음악을 들으시려면 ☞ 위 본문에서 Spiegel im Spiegel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2022. 7. 2.
왜 책읽기에 미쳐 지냈나? 지금은 들어앉아 있지만 최근까지 나는 '삼식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몇 시간짜리 나들이를 하게 되면 기차표 구입 다음에는 꼭 가지고 갈 책을 골랐습니다. 시내에 나갈 때도 매번 책을 갖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인가를 판단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책을 읽는 걸 아내가 '승인'해 주는지 아닌지를 늘 느낌으로 판단하며 지냈고(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주고 있지만), 혼자 앉아 있는 자유시간 중 얼마만큼을 독서시간으로 할애할 수 있는지부터 계산하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일할 때에도 그게 단 5분, 10분이어도 늘 '지금 이 시간은 책을 좀 읽어도 되는가?'를 염두에 두며 살았고, 최근에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나는 일생 동안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여 읽었나?'를 계산하며 .. 2022. 6. 29.
성희의 생각, 성희 생각 (2) "아, 너무 아름다워요~" 성희 부부는 저 언덕에 수레국화와 함께 쑥부쟁이 씨앗도 뿌렸습니다. 봄에 새싹이 돋을 때 노인은 난감했습니다. 야생화와 잡초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수레국화는 한꺼번에 화르르 피어나서 '이건 꽃이겠구나' 했는데, '쑥부쟁이'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이름 첫 자가 '쑥'이어서 '아마도 쑥 비슷한 종류겠지?' 짐작만 했습니다. 지난해엔 저 언덕의 잡초를 뽑으며 쑥 비슷한 것이 있는가 잘 살펴보았습니다. 쑥은 흔했지만 쑥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쑥은 쑥떡의 재료가 되니까 그냥 둘까 했는데 "그냥 두면 결국 쑥대밭이 된다"고 강조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노인은 말만 들어도 '쑥대밭'이 되는 꼴은 보기 싫었습니다.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쑥은 잘 뽑고 개망초도 잘 아니까 개망초다 싶은 것도 고개를 .. 2022. 6. 20.
박승우「꽃피는 지하철역」 꽃피는 지하철역 박승우(1961~ ) 지하철역 이름이 꽃 이름이면 좋겠어 목련역, 개나리역, 진달래역, 라일락역, 들국화역… 꽃 이름을 붙이면 지하철역이 꽃밭 같을 거야. ‘친구야, 오늘 민들레역에서 만날래?’ 이 한마디로도 친구와 난 꽃밭에서 만나는 기분일 거야.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늘 꽃 이름을 부르겠지 원추리, 백일홍, 바람꽃, 금낭화, 물망초… 자주 부르다 보면 사람들도 꽃이 된 느낌일 거야. ‘이번 정차할 역은 수선화역입니다. 다음 역은 채송화역입니다’ 지하철 방송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이 송이송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겠지 사람들한테 꽃향기가 나겠지. 그새 또 8년이 지났네? 2014년 5월 14일(수) 조선일보에서 봤으니까('가슴으로 읽는 동시' 아동문학가 이준관 소개). 오월의 지하철역은 꽃 .. 2022. 6. 18.
성희의 생각, 성희 생각 성희는 이 서방을 데리고 와서 저 언덕에 야생화 씨앗을 흠뻑 뿌렸습니다. 이 서방은 애초에는 메밀 씨를 뿌리자, 하얀 달밤에 메밀꽃 핀 모습을 내다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었습니다. 노인은 겨울밤에도 메밀꽃이 피어 있는 장면을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꿈이나 꾸면서 살아가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성희도 이 서방도 초췌해진 노인이 꽃을 심고 잡초를 뽑는다고 끙끙거리는 건 별로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꽃씨를 뿌리는 날, 그들은 잡초가 나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보기 좋은 잡초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엔 저 언덕이 수레국화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 뭐 이런가 했겠지만 어떤 사람은 드러내어 "장관이네!" 했습니다. 병약한 노인은 '장관(壯觀)'이.. 2022. 6. 8.
눈물 너머 아카시아꽃 # 1 내 형제 중 한 명이 다 없애버렸지만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매년 우등상을 받았습니다. 4학년 담임 ○인○ 선생은 우등상은 자신이 거주하는 그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상 따위는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걸핏하면 매질을 했습니다. 특히 비 오는 날 그 짓을 자주 했는데 자신이 맞을 매를 자신이 준비해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가느다란 것, 짧은 것을 가져오면 선생이 갖고 있는 매로 때리겠다고 해서 손가락 세 개 정도 굵기는 되어야 만족했습니다. 나는 늘 매 맞을 아이들 중 한 명이 되었는데 내가 뭘 잘못한 것인지 그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선생이 풀지 못하는 산수 문제를 말없이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 2022. 5. 25.
다짐 국민학교 다닐 때는 사이렌이 울리면 재빨리 '책보'를 싸서 머리에 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괴뢰군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할 경우를 대비하는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는 줄도 모른 채 들에서 일만 하고 있을 아버지와 엄마가 걱정스러웠고, 평상시와 하나도 다름없는 두 분을 보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본래 어리석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십 년 간 사회정의 구현의 기본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초임 학교에서의 어느 날, 1교시 후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홍보하려고 마을로 나갔습니다. 농촌이 한창 바쁜 시기였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좀 나오라고 해서 곧 국민투표를 하게 되는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 2022. 5. 12.
이곳에 돌아옴 난들 왜 몰랐겠는가 이렇게 가는 길 달 뜨는 저녁 별 지는 새벽 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날들의 즐거움 이어지는 허전함, 외로움 왜 몰랐겠는가 2022. 5. 10.
송화가루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근무하다가 교장 발령을 받아서 나간 학교는 참 조용했습니다. 광화문의 그 번잡함에 길들었던 나에게 그 조용함은 결코 서두르지는 않는 변화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뭐랄까, 아득하고 아늑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을 아침 교장실에 들어가면 귀뚜라미가 그제도 울고 있었고, 아이들이 공부에 열중하는 아침나절의 고요함을 뻐꾸기 혼자 깨어보려고 목청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주차장으로 가면 자동차 유리창이 노란 송화가루로 덮여 있었습니다. ○모네는 명절이 되면 송화가루로 다식을 만들었습니다. 꿀로 버무린 그 다식을 입에 넣으면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나 싶고 나보다 딱 한 살 적은 ○모의 아들이 부러웠습니다. ○모네 말고는 아무도 송화가루로만 만드는 다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네.. 2022. 5. 9.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그냥 재미 삼아 쓴 소설은 아니었다. 순전히 우수(憂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독후감을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그 석연치 않음으로 우수의 사례를 옮겨 써 보자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골라놓은 것이 우선 옮겨 쓰기에는 너무 길었다. 어쩔 수 없어서 발췌를 해보았는데,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버려서 제목도 저렇게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이라고 아버지 이야기에 따르게 되었다. 1862년 끝여름 무렵 마담 에벨리나 코르제니오프스키는 당시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아들 테오도르 조지프 콘래드를 데리고 포돌리아(지금은 우끄라이나 서부지역으로 당시는 러시아령 폴란드였다)의 작은 도시 치토미르를 떠나 바르샤바로 갔다. 문학활.. 2022. 5. 7.
정은숙「멀리 와서 울었네」 멀리 와서 울었네 지하 주차장, 신음 소리 들린다. 방음 장치가 완벽한 차창을 뚫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 그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그가 낮게 낮게 시간의 파도 속을 떠다닌다. 눈물이 거센 파도가 되고 멈춰 선 차들은 춤을 추네. 울음소리에 스며들어 점차 나는 없네. 이 차는 이제 옛날의 그 차가 아니라네. 이 차는 속으로 울어버린 것이라네. 나를 싣고서 떠나가 버렸다네. ―정은숙(1962~ )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울어본 적이 있는지. 울려고 가다가 중간에 참던 울음을 쏟아진 적이 있는지. 미처 틀어막지 못한 울음 때문에 두리번거린 적이 있는지. 누구도 오래 머물길 원치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의 문을 잠그고 .. 2022.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