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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3

W.G. 제발트『이민자들』Ⅲ (나는 나의 주인인가?) W.G. 제발트(소설)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거의 십 년 전의 이 메모를 꺼내보았다. 이런 기막힌 인생도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남달리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최상류층 집안에서만 일했으므로 인맥이 많아 고향(독일)에서 온 가족과 친지들에게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해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거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매년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맨해튼으로 상륙하여 바워리가와 로우어 이스트 싸이드에 집결했다. 그는 1886년 독일 켐프텐 근처 고프레히츠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첫 번째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두 살도.. 2022. 1. 2.
나이든 사람들은 불쌍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라는 책에서 세 토막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둘째 세째 토막만 옮겨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의미 파악에 지장이 있어서 첫째 토막까지 옮겨놓았는데 첫째 토막은 그 의미가 어렴풋해서 둘째 토막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만으로 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 2021. 11. 14.
인간세상이 그리운 곳 반겨줄 사람 없는데도 인간세상이 그립습니다. 정겨운 사람과 마치 옛날처럼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런데도 그립습니다. 아파트에 들어앉아서도 그렇습니다. 창밖의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들려오면 더 그렇습니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정겨운 대화일 것 같습니다. 나가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듯해서 들어앉아 있는 것조차 괜찮다 싶습니다. '적막강산'인 곳도 있습니다. 밤이 되면 이름 모를 무엇이 울고, 밖으로 나서면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입니다. 불빛은 누가 사는지도 알 수 없는 단 한 집뿐입니다. 자다가 일어나 창문을 내다봐도 그 집 보안등뿐입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나는 출근하지 않습니다. 출근할 곳이 없습니다.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여기 있어야.. 2021. 11. 10.
하루 또 하루...... 어제저녁이 잠시 전이었는데 오늘 또 날이 저물었습니다. 2021. 11. 5.
황순분 「코스모스」 코스모스 코스모스 아름답다.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구절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 코스모스가 반가워서 코스모스 꽃밭이 선물 같다고 썼던 자신이 한심하구나 싶었습니다. 저 한적한 길의 코스모스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저 코스모스가 순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저 시인이 그 코스모스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게 참 미안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이제 보니까 첫 문장 "코스모스 아름답다"는 평범함을 가장한 예사로움 같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2021. 11. 3.
혼자 가는 길 여기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동쪽으로는 마당 건너편 계곡이 숲으로 이어집니다. 새들의 희한한 대화를 들을 수 있고 모기 같은 벌레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녁을 먹고 현관을 나서는데 때아닌 매미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둠이 짙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워낙 조용하니까 내 이명(耳鳴)이 또 장난을 하나?' 멈춰 서서 작정하고 들어 보았습니다. 날개로 땅을 쓰는 소리도 함께 들립니다. 아! 소리는 바로 발밑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얼른 스마트폰의 손전등을 켰습니다. 이런! 날개를 퍼덕이며 매미가 울고 있습니다. 구월 초사흘, 한로(寒露)에 매미라니! 하루하루 기온이 떨어져 그에게는 치명적일 것입니다. '저 숲으로부터 매미소리가 들려온 것이 칠월이라면 팔월 한 달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다가 여기를 찾.. 2021. 10. 13.
안병영 에세이 《인생 삼모작》 안병영 에세이 《인생 삼모작》 21세기북스 2021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두 번 교육부 장관을 지낸 분이다. 김영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때였고, 공교롭게도 그 두 번 다 근무 기간이 겹쳤다. 곁에서 보면 어이없지 않은가 싶은 분도 없진 않지만 이런 분도 있나 싶은 분도 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말단 직원이어서 개인적으로 장관을 만날 일은 없었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는 자주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사사로운 격려와 함께 심지어 꾸중을 듣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교장으로 나갔을 때 부총리직에서 물러나 연세대 교수로 복귀했을 때였고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각각 강의를 해주기도 해서 나로서는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 보좌신부님이 교리반 아이들을 모아, 성당에서 봉사해야 할 역할에 따라 .. 2021. 10. 11.
이 가을 열매 훔치기 아파트 앞을 오르내린 것밖에 없는 것 같은 하루도 있습니다. 도서관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집에 있는 책이나 읽습니다. 찔레꽃 열매일까요? 도서관으로 들어가고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목제 계단 옆 이 아파트 화단에서 해마다 보았습니다. 사진 왼쪽 아래편에 우리 아파트 철책도 보이지 않습니까? 기회를 노렸는데 이번에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정수리는 환한 볼품없는 남자 주제에 이 열매를 바라보고 있으면, 게다가 허름한 스마트폰으로 이 열매를 훔쳐가는 모습을 우리 아파트 아리따운 '여성분들'이 보면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얼마나 분통 터진다 하겠습니까? 그걸 내가 이렇게 찍어와 버린 것입니다! 올해는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2021. 10. 5.
모처럼 화창한 이런 날 2019년이었나? 그해 가을, 날씨가 좋은 날마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른바 '공사 간에' 사소한 일들이야 늘 일어나는 것이고 마음이 흔들릴 만큼의 부담을 주는 큰 일만 없으면 살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아도 불안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해 가을도 그랬겠지?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괜히 '이러다가 무슨 일이 나는 거나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런 건 말도 꺼내기 싫지만 흔히 "전쟁 전야"라는 말을 쓰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진다더니, 이 가을도 오자마자 저 하늘이 더 높아진 것 같았다. 하늘이 정말 높아지나? 그건 아니겠지? 이런 하늘에 대한 좋은 묘사가 어디 있었지 싶어서 찾아보았더니 소설 "하우스 키핑"(매릴린 로빈.. 2021. 10. 3.
볼 만한 프로그램 TV 채널이 0부터 999번까지 있다는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때 나는 그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마치 스마트폰의 기능 중 전화는 겨우 1/100쯤이라는 IT 애호가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그 100가지 채널을 어떻게 다 파악해서 골고루 보고 중요한 걸 꼭 챙겨 보고 봐야 할 걸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까, 그게 걱정스러웠고, 세상이 그렇게 되도록 '지상파'(그런데 지상파가 도대체 뭐지?) 방송도 제대로 시청하지 않는(한때 교육자였으면서도 EBS 교육방송 중 유익한 프로그램조차 전혀 시청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더욱 형편없고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거나 말거나 세상의 방송은 잘도 돌아가는구나... 방송이 천 가지라니... 아따 세상 참...' 그러다가 곧 돈을 더 내고 이른바 지상파.. 2021. 9. 29.
내 눈 어머니는 구석에 웅크린 채 책을 읽었다. 편한 자세로, 천천히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맨발을 다리 아래로 감추고 책을 읽었다. 몸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책 위로 굽히고, 책을 읽었다. 등을 웅크리고, 목은 앞쪽으로 숙이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채, 몸을 초승달처럼 하고 책을 읽었다. 얼굴은 반쯤 검은 머리칼로 가린 채, 책장 위로 몸을 구부리고 책을 읽었다. 내가 바깥 뜰에서 놀고, 아버지는 자기 책상에 앉아 연구하며 갑갑한 색인 카드들에 글을 쓰는 동안, 어머니는 매일 저녁 책을 읽었고, 저녁 먹은 것들을 다 치운 후에도 책을 읽었으며, 아버지와 내가 함께 아버지 책상에 앉아, 내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아버지 어깨에 고개를 가볍게 대고, 우표를 분류하고, 분류 책에.. 2021. 9. 22.
서귀포 이종옥 선생님 오랫동안 교육부에서 근무하다가 용인 성복초등학교에 가서 이종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 선생님들은 모두 이종옥 선생님 후배여서 그분을 "왕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왕언니"라는 호칭은 거기서 처음 들었기 때문에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교육부에서 내려온 교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미워한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되어 온 것이 미운 것이 아니라 교육부 직원이었기 때문에 미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온다고 해서 당장 사직을 하려다가 교육부에서 근무한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교원들이 그렇게들 미워하는가 직접 만나보기나 하고 명퇴를 하겠다"고 그 학교 교직원들에게 공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분들 .. 202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