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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3

"나도 한때는 새것이었네" 모처럼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을 굶고 가서 채혈을 했고 러닝머신에 올라가서 걷고 뛰어야 하니까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울까 싶어서 그걸 샀지만 내키지 않아서 차에 갖다 두고 네 가지 검사를 더 받았습니다. 모처럼이었으므로 그동안 변한 것도 있어서 질문을 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절합니다. 그렇다고 "참 친절하시네요" 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지?' 친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뭘 물으면 간단히 대답하면 될 걸 가지고 아예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걸 보면 '노인이라고 이러는구나' 싶지만 끈기 있게 듣습니다. 그렇게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세요" 하거나 "나는 이 병원 십삼 년째 드나듭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21. 7. 4.
나는 아무래도 개망초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이 개망초 밭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무래도 나는 개망초과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꽃을 좋아합니까?" 미팅 같은 건 내겐 이제 혹 저승에 가서나 있을지 모르지만 가령 그렇게 물을 때 뭐라고 답하면 좋겠습니까? "전 장미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답하면 돋보이거나 어울리거나 그 외모조차 장미 같아 보이거나 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파란편지라니, 우습지 않겠습니까? 나 참 같잖아서... "저는 수선화를 좋아합니다" "저는 히야신스를 좋아합니다" "저는 붓꽃 마니아입니다" "저는 고흐처럼 해바라기 광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국화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자귀나무 꽃을 좋아합니다" "저는 저 여성스러운 수국을 좋아합니다" ...... 사실은 그동안 꽃을 .. 2021. 6. 28.
쓸쓸한 곳 (3) 쓸쓸한 곳, 좋은 곳 2021. 6. 22.
전문가 보일러가 이상했습니다. 방 1이 따뜻하면 방 2가 냉방이 되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방 2가 따뜻해지면 돌연 방 1이 냉방이 되었습니다. 방 1, 2가 골탕을 먹이자고 약속해놓고 번갈아가며 약을 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방 1, 2의 온도조절기를 동시에 켜놓고 약 한 달간 그런 현상을 겪었으므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방 1에서 지내다가 2, 3일 후에는 방 2에서 지내야 하는 게 성가시고 한심했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기거하는 방은 딱 둘이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는 꼴이어서 오늘은 방 1에 이부자리를 마련하고 내일은 또 방 2에 이부자리를 펴면서 이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보일러 관계자들은 그럴 리 없다고 했습니다. 이곳.. 2021. 6. 15.
쓸쓸한 곳 (2) 쓸쓸한 곳, 좋은 곳 2021. 6. 9.
쓸쓸한 곳 (1) 쓸쓸한 곳, 좋은 곳 2021. 5. 28.
"나는 이미 유령입니다" # 1 지금은 아파트 앞 미장원(헤어샵?)을 기웃거리다가 손님이 없구나 싶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슬쩍 들어가지만 전에는 굳이 이발소(말하자면 남성용 '헤어샵')를 찾았고 그것도 현직에 있을 때처럼 꼭 주말을 이용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리 없어서 연중 '주말'인데도 그딴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굳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차를 가지고 멀리 이웃 동네에 있는 이발소를 찾아가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퇴임한 지 네댓 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아침나절이었습니다. 이미 두어 명이 소파에서 주말판 신문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 머리를 깎고 있는 중년은 분명 K 교사였습니다. 들어서면서 거울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그 순간! .. 2021. 5. 14.
인간 엄장의 길 이 글을 필사하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극락에 가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요! 나는 일쑤 내 거처로 들어온 개미 두어 마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끝으로 눌러 죽입니다. 그것들에게 영혼이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질 않네요. 그럼 내 영혼도 없음을 확신하고 끝나는 날 저녁 누가 내려다보고 있어도 좋고 사라져도 좋다고 하면 사라지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작업을? 온갖 상념을 불러오는 이런 이야기가 좋았을 뿐입니다. 엄장과 광덕,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나는 서방 극락 세계로 간 광덕이 아니라 광덕의 아내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엄장입니다. 나는 인간 엄장을 생각하며 이 글을 필사했습니다. 인간의 길은 끝이 없음을 확인하며 가는 봄날 밤입니다. 광덕이 서방 극락으로 가다 문무왕 때 사문 광덕廣德과 .. 2021. 5. 10.
사기꾼 아저씨의 요지경 아버지께서 요지경 구경을 허락하신 건 우리가 참으로 무료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결과였을까? '이 세상에는 이 벽지 같은 곳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다른 곳이 너무나 많아서 요지경 같다는 걸 알아두어라.' 그때 나는 요지경이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와 있다. '알쏭달쏭하고 묘한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설명은 본래의 요지경을 설명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집 살림은 요지경이야"라거나 "세상은 혼탁한 요지경 속"이라고 할 때의 그 요지경이어서 이 비유적 설명을 읽어봐야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그 요지경이 뭐지?' 다른 하나의 설명은 '확대경이 달린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그 속의 여러 가지 그림.. 2021. 3. 31.
저승 가는 길 저승 가는 길을 그려봅니다. 저승은 분주한 곳이 분명하지만 경계가 삼엄하고 조직이 치밀한 한 곳이 아니라 쓸쓸하거나 썰렁하다 해도 이미 그곳을 찾아가야 할 사람은 찾게 되어 있으므로 무슨 대단한 환영식 준비하듯 여럿이 나를 데리러 오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승으로 오라!"는 그 통지를 무시하면 어떤 조치가 내려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시지프의 신화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가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가야 하고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까만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기묘하게 화장을 한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한두 명일 것이고, 십중팔구 혼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안내될 테니까(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내 엄마도 갔고, 중학교 1학년 봄 .. 2021. 3. 23.
그리운 그 다방茶房 재작년 여름이었지요, 아마? 진고개에서 들어가 본 다방이 분명합니다. 하여간 전철역에서 올라가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길가의 그 식당, 널찍하고 온갖 부침 세트가 인기여서 각종 모임이 잦다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 커피숍을 찾으면 바로 눈에 띄는 이층의 다방입니다. 커피숍은 아닙니다. 다방입니다, 다방. 옛날식 다방. 이름요? 이름은... 글쎄요~ 전원? 정? 역마차? 대륙? 만남? 호수? 추억? 길? 팔팔? 도심? 진고개? 모르겠네요. 생각할수록 점점 더 헛갈려 온갖 이름이 떠오르네요.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 찾기 쉬워서 이름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걸요?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서 문을 밀고 들어가면, 붉은 우단으로 된 높다란 의자가 꽉 들어 차 있어서 첫 인상으로.. 2021. 3. 13.
나는 왜 아플까? 심장병이 걸려 응급실에 실려가고 두 차례 핏줄도 뚫고 했다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고, 무슨 자랑거리나 생긴 것처럼 "이렇게 지낸다"며 이 블로그에 쓰고, 그렇게 지내다가 내 건강을 기도한다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기도? 나를 위해? 놀라웠습니다. 우선 나는 정말 기도를 필요로 하는가, 공연한 일 아닌가 싶었습니다. 절실하면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도 흔히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는 있고 쑥스럽지만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라는 걸 오십 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단 하루이틀만이라도 말미를 달라는 기도를 하며 직접 확인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구태여 효과를 바라지 않거나 효과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도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2021.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