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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앨리스 먼로 ... 기억 보트가 움직이자마자 옆자리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트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항해 내내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갑판으로 나가 사람이 거의 없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구명 용품이 든 통 중 하나에 자리 잡고 앉은 그녀는 익숙한 장소들, 또 알지 못할 장소들에 대해 아련한 아픔을 느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기억'함으로써 그 모든 일을 다시 한 번 경험한 후 봉인해 영원히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놓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날의 일을 순서대로 재구성해 마치 보물인 양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해 넣어두려는 것이었다. 메리얼은 두 가지 일을 예상할 수 있.. 2022. 2. 23.
여기 이 세상에 눈 내리는 날 점심때쯤 눈이 내렸다. 하늘이 부옇긴 해도 구름 사이로 자주 햇빛이 비쳐 내려서 곧 그치겠지 했는데 두어 시간은 내렸고 쌓이진 않고 곧 사라졌다. 바람이 불면 눈송이들이 스스로 갈 길을 찾아가겠다는 듯 제각각 흩날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난분분 난분분'이란 말이 떠올랐지만 그건 '흩날려 어지럽다'(亂粉粉)는 뜻이어서 눈송이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이 떠돌아다니는 듯한 그 모습을 '난분분'이라고 하는 건 마땅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또 눈이 내리는구나 했고, 나는 나의 세상과 함께 점점 축소되고 있고 그렇지 않던 힘이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그걸 입밖에 내어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서글픈 일이 아닌가. 2022. 2. 21.
"사람의 일생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람의 일생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종호, 「산등성이의 남향 참호」 『현대문학』 연재 《회상기回想記-나의 1950년》 제10회(2015년 10월호, 206쪽). "한국 인구에 다섯을 기여한 뒤 심장마비로 4·19 나던 해 쉰이 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뜬 작은이모의 전성시대"를 이야기하며. 나의 어머니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은 죽어서도 흔들렸다. 나도 따라 흔들렸다. 2022. 2. 20.
선물, 저 엄청난 색의 세계 5학년 때였던가 6학년 때였던가, 모처럼 12색인 크레파스를 앞에 놓고 황홀했었다. '이런 색도 있단 말이지?' 온갖 색깔을 거쳐 무채색마저 흰색, 회색, 검은색 세 가지를 다 갖추어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바다를 그리면서 한 가지 색으로 칠하게 되므로 다른 책은 쓰지 않아서 좋았고 더구나 하늘도 파란색이어서 더 좋았다. 괜히 다른 색을 써야 한다면 그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 파란색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닳아서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다음에는 초록과 검정 두 가지 색만 쓰면 되는 수박을 그렸고 그다음엔 노랑과 빨강 두 가지 색만 써서 태양을 그렸다. 크레파스가 퍽 퍽 닳은 걸 보면 색칠이 희미하긴 하지만 잘 닳지 않는 크레용이 더 실용적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화려한 존재의 .. 2022. 2. 14.
이 세월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달랑 "설명할 길도 없고 설명해봤자 별 수 없는 세월…"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옵니다. 베이징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고 적지 않은 나이에 기저질환이 있는 나에게 코로나는 여전히 위협적인 나날입니다. 순조로운 건 이야기하기가 쑥스럽긴 하지만 나의 이 세상에서는 단지 시간의 흐름뿐입니다. 일주일 후면 '우수'니까 봄이 완연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수(雨水)가 걸핏하면 우수(憂愁)가 되어 떠오릅니다. 문득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네 시간을 마치고 우리 교실이 있는 건물 뒤편 공민학교에 다니는 이웃집 성완(誠完)이 형을 찾아간 그 시간이 떠오릅니다. 칠십 년 가까이 지나가버린 그 시간은, 봄이 오면 꼭 한두 번씩 떠올려본 장면입니다. "봄비가 내립니.. 2022. 2. 12.
"마음이 아파서 우야노~ 힐링하러 오이소~" 마트 네거리에 걸린 점집 안내 현수막 글귀가 마음을 끌었다. "마음이 아파서 우야노~ 힐링하러 오이소~" 대단한 걸 알려주거나 팔자를 고쳐주겠다고 하지 않았네? 저 사람들은 길흉화복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 아닌가? 겨우 힐링이나 해주겠다고? 생각하다가, 힐링이라도 확실하다면 큰 것이긴 하네, 하고 고쳐 생각했다. 요즘은 마음이 아프고 나을 기미는 전혀 없다.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우울하다. 코로나 블루 때문인가? 그렇긴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점집에 간다고 힐링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점집에서 코로나의 특성을 알 것 같지도 않고, 당신도 곧 나이가 줄어들어 청장년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해주지도 못할 것이어서 점집 연락처도 적어 오지 않았다. 나의 우울에는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보편적.. 2022. 1. 31.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엊그제 저녁에 1978년에 담임한 달동네 아이 S가 전화를 했습니다. 57세쯤? 손주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전기공사 일을 한다고 했고, 서울에서 일해 보라는 제의가 왔는데 돈을 엄청 더 벌 수 있고 선생님도 만나볼 수 있을 텐데 '서울 일을 하겠나' 싶더라고, 자신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새 또 한 해가 가서 설을 앞두고 있고, 서너 시간 운전해서 서울 가면 선생님 만나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선생님은 괜찮다 하실 텐데 그것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 J에게서는 자주 전화 오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내게 전화를 하려고 술 한 잔 마셨거나 술 한 잔 하니까 전화를 하고 싶었거나 했을 것입니다. 이제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아이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 2022. 1. 24.
테레사 수녀님의 선종 1997년, 광화문 그 빌딩에서 미친놈처럼 일하던 그해 초가을 수녀님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슬펐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다 하겠지만 나는 잠시 이 나라 이 사회의 교육을 위해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수녀님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분은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고 하셨다.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 아직 대구에 있을 때, 이튿날 아침 회의에 참석하려고 너무 늦게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린 밤, 호객하는 여인을 따라 여인숙에 들어갔었다. 행색을 살펴본 여인은 곧장 솜 이부자리를 펴 준 다음 또 다른 남자를 찾으러 나갔고 나는 예상보다 더 포근한 그 이부자리 속에서 이내 세상모른 채 잠이 들었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 2022. 1. 21.
다시 "초보운전" 지난해 12월에 운전면허증을 새로 받았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일까?' 사진과 시력검사 결과표 등을 가지고 경찰서에 들어서 차례를 기다리며 다음에 다시 받으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아서 벽에 붙은 설명서를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저처럼 허름한 노인 두 명은 면허증을 반납하며 정부에서 주는 상품권 사용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장면들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습니다. 접수를 받던 예전의 그 싹싹하고 젊은 여순경은 보이지 않고 사무실 저 안쪽에 여순경이 보이긴 했지만 창구 직원은 아무래도 민간인 같았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 파출소로 면허증을 찾으러 갔습니다. '내게는 이제 무슨 자격증은 이것뿐이네?' 파출소 마당을 건너가며 그 생각을 했습니다. 남녀 .. 2022. 1. 14.
나이 충격 2014년 여름의 일이었으니 또 몇 년이 지나갔네요. '사랑의 음악회 특별무료초대권'이 사무실 엘리베이터 안에 꽂혀 있는 걸 보고 얼른 한 장 거머쥐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유의사항 첫 번째가 "27세 이상 65세 이하"여서 나는 오래전에 이미 '자격 미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런! 내가 어쩌다가 벌써..... 그다음부터는 궁색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세종대학교 대양홀?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할까? 어금버금한 나이, 어금버금한 행색이면 "신분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지금 막 65세입니다"라고 해서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르신은 얼굴 검버섯만 봐도 칠십 세는 되는 것 같습니다" 하면 어떻게 하나? 구체적인 몇 가지 걱.. 2022. 1. 12.
젊음 예찬 2022. 1. 4.
W.G. 제발트『이민자들』Ⅲ (나는 나의 주인인가?) W.G. 제발트(소설)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거의 십 년 전의 이 메모를 꺼내보았다. 이런 기막힌 인생도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남달리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최상류층 집안에서만 일했으므로 인맥이 많아 고향(독일)에서 온 가족과 친지들에게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해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거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매년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맨해튼으로 상륙하여 바워리가와 로우어 이스트 싸이드에 집결했다. 그는 1886년 독일 켐프텐 근처 고프레히츠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첫 번째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두 살도.. 2022.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