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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영혼 ③ 고양이네 가족 내가 포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동안 고양이 일가족 세 명(?)이 놀다가 갔습니다. 저 가족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있고 저 가족에게는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건 무엇입니까? 우애? 모정? 사랑? 영혼? 글쎄요... 2022. 9. 20.
잘도 오는 가을 뭘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단 한 번도 제때 오지 않고 난데없이 나타나곤 했다. 기온이 아직은 30도를 오르내리는데 시골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물들여버렸다. 결국 올해도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식이면 누가 어디에 대고 어떻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의를 할 수 있겠는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따르기가 싫다. 2022. 9. 18.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연인이었다고 해서 좀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작가였다. 노인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단지 지배 계급들 내부에서만 제기되며(게다가 남자들), 19세기까지 '늙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노인들이 많지도 않았다.(121) 노년은 비참한 것이다. 노년에 대해 위안을 받기보다는 낙심을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라고나 할까?(152~15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50세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에 달해야만 '프레노시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노시스란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신중한 지혜로, 체험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 2022. 9. 15.
영혼 ② 저 소 눈빛 좀 봐 내가 축사 앞에 서면 쳐다보기도 하고 설설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듯한 표정입니다. - 왜 들여다봐? - 심심한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생각해? - 거기 축사 안에서만 평생을 지내다가 가니까. (도살장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어렵다. 저들도 안다.) - 너희 인간들은 달라? 갇혀 살지 않아? - 글쎄, 우리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잖아. 달나라에도 가잖아. - 그게 대단해? 속담에도 있잖아. 오십 보 백 보... - 오십 보 백 보...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네. 나는 저 어미소와 아기 소(송아지)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저리도 다정할까요? 저 앉음새의 사랑 속에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겠지요? 나는 축사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2022. 9. 11.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
영혼 ① 빵집 앞 강아지 빵집 앞에서 저 강아지가 네 박자로 짖고 있었습니다.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 나는 빵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저 모습을 보았는데 강아지는 빵집을 향해 똑바로 서서 네 박자씩 줄기차게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유모차 안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 이 강아지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짖고 있을까? - 자신이 주인보다 윗길이라고 여기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걸까?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당장 나오지 않고!" - 아니면? 애원조로? '제발 빨리 좀 나오세요. 부탁이에요~ 초조해 죽겠어요. ㅜㅜ'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짖는 모습이나 그 목청으로 보면 아무래도 "들어간 .. 2022. 9. 8.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붓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 2022. 9. 3.
시력視力지키기 1, 2는 그렇다 치고 핵심이라면 컴퓨터나 스마트폰, 책 같은 걸 들여다보다가 30분쯤 지나 창밖 좀 내다보면 시력 보호에 좋다, 자주 듣고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눈을 혹사시켰습니다. ​ 어느 날 동네 운동장에 걸어내려갔다가 시야가 부옇게 흐려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아서 '뭐지?' '왜 이러지?' 하고 눈을 닦고 바라보고 또 눈을 닦고 바라보고 하다가 '내가, 내 눈이 왜 이렇게 됐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온갖 '외로움'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눈만 있으면 마지막까지 책은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러면 됐다는 것이 내 '서러운 다짐'이었는데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암담했습니다. ​ 증상은 간단히 판명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그 백내장이라는 것이고 당장 맹인이 .. 2022. 9. 2.
"서투르고 어설픈 내 인생" 젊었던 시절에는 아내로부터 꾸중이나 원망, 잔소리 같은 걸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내는 내 위세에 눌려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속에 넣어놓고 지냈을 것입니다. ​ 살아간다는 건 내게는 하나씩 둘씩 어설픈 일들을 벌이고 쌓아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내가 그걸 때맞추어 지적했다면 나는 수없는 질책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 아내는 이젠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고, 이젠 내 허물을 보아 넘기지 않게 되었고, 그때마다 지난날들의 허물까지 다 들추어버립니다. 아무래도 헤어지자고 하겠구나 싶은데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 걸 나는 신기하고 고맙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부터 이런 질책을 듣지 않는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한탄합니다. 공자님 말씀 "七十而從.. 2022. 9. 1.
어처구니없이 가버린 여름 입추가 되어도 더위는 여전했지 않습니까? '이러려면 입추는 왜 있는 거지?' 그런데 처서가 되자 거짓말처럼 더위가 물러가버렸고 이불을 덮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이틀 만에 얼른 겨울이불로 바꿨습니다. '이러다가 변을 당하겠네?' 아침 기온이 당장 13도까지 내려가버렸습니다. 거기에 추절추절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그치면 결국은 기온이 더 떨어질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엊그제는 여름이었는데 금방 가을을 지나 겨울이면, 계절의 변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누가 이 꼴을 만들어놓았는지, 사람들이 하도 잘난 척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이런 현상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나타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무더위를 괜히 원망했다 싶고, 사람 마음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이렇게 뒤집어질 수.. 2022. 8. 31.
"겨울 추위가 가득한 밤" 거기도 비가 내립니까? 가을이 여름의 뒤를 자꾸 밀어내는 듯합니다. 18일이니까 열흘쯤 전이었고 엄청 더웠습니다. 습도가 높아서 보일러를 잠깐만 가동했는데 이번에는 습도도 높고 후끈거려서 '체감습도'가 더욱더 높아졌으므로 비가 내리거나 말거나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걸핏하면 스마트폰에서 날씨나 확인합니다. 내가 날씨를 자주 확인한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는 건 아니고 그렇게 확인하나마나 날씨는 정해진대로 '업데이트'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에서 날씨를 확인하는 건 나에게는 전혀 쓸데가 없는 짓인데도 나는 가능한 한 자주 확인하며 지냅니다. ​ 그날 오후 4시쯤 스마트폰을 들여다봤을 때는 기온 30도, 체감 온도 32도 표시 아래 이렇게 안내되고 있었습니다. ​ 겨울 .. 2022. 8. 29.
인간의 역할 나는 자주 미래의 모습들을 가지고 장난을 쳤고, 내게 배정되어 있을 역할들, 시인이나 어쩌면 예언자, 아니면 화가 등의 역할들을 꿈꾸었다.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문학작품을 쓰거나 설교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도 그런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오로지 곁다리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154) 나 자신에게로?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누구지? 나는 언제 인간의 역할을 하게 되지? 2022.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