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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은퇴 전에 준비해놓을걸…' 은퇴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이 '노후자금' '취미' '체력'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여가는 있는데 돈과 체력이 부족하고 뭘 할지 막연하다는 것이지요. 지난 2014년 연말에 삼성생명에서 설문조사한 결과입니다(조선일보 2014.12.3). 은퇴자 93명을 대상으로 돈·생활, 일·인간관계, 건강 세 가지에 대해 '무엇을 가장 후회하는가?' 물었더니 노후 여가 자금을 준비하지 않았고, 평생 즐길 취미가 없고, 운동으로 체력 단련을 못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돈과 생활'에 대해서는 노후 여가 자금 준비를 못한 것 외에도 여행을 못했고,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았고, 노후 소득을 위한 설계를 제대로 못한 것을 아쉬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또 '일과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취미를 개발하지 못.. 2022. 4. 25.
심익운(沈翼雲) 「딸을 잃고 처음 강가로 나갔다」 딸을 잃고 처음 강가로 나갔다 집의 좌우에 약초밭과 화원이 있어 어딜 가든 따라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음이 아파도 책은 펼쳐보지 않는다. 책을 말리던 그날 네가 받쳐 들던 모습이 떠올라서다. 喪兒後 初出湖上 悲悼殊甚 詩以志之 藥圃花園屋左右(약포화원옥좌우) 閑居何處不從行(한거하처불종행) 傷心未忍開書帙(상심미인개서질) 曬日他時憶爾擎(쇄일타시억이경) 영조 시대에 천재로 알려진 지산(芝山) 심익운(沈翼雲·1734~?)이 어린 딸을 잃고 썼다. 사는 집의 좌우 양편에는 약초밭도 있고 화원도 있어 한가로이 집에 머물 때면 자주 나가봤다. 그때마다 딸은 꼭 뒤따라 나와 함께 걸었다. 이제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약초밭이고 화원이고 가질 않는다. 그나마 아픈 마음을 잊기에는 책을 읽는 것이 좋을 텐데 그 책도 펼치.. 2022. 4. 20.
그리운 제라늄 : '치구의 情' '이쁜준서' 님 블로그 《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는 화초 얘기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라늄 이야기가 등장해서 그 블로그 검색창에 제라늄을 넣어봤더니 스물네 가지쯤 올라와 있었습니다. 단어까지 치면 아마 수백 개가 될 것입니다. '하필 제라늄을 왜?' 제라늄 화분을 '옥상정원'에서 월동시켰는데 지금 아주 고운 꽃이 피었다고 해서 '그게 본래 그런(기특한! 든든한!... 그런) 녀석이었구나' 싶었습니다. # 내가 교사였을 때는 '1인 1화분' 시책이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1인 1화분'?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한 학년 올라가면 교실이 바뀌고, 그 교실 환경을 그럴듯하게 조성하면서 창가에는 아이들이 가져온 화분을 올려놓곤 했지 않습니까? 초임의 산촌 학교에서는 1인 1화분을 하지 않았습니다.. 2022. 4. 17.
벚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던 날 지난 13일 수요일, 겨우 사흘 전이었군요. 벚꽃잎이 휘날렸습니다. 눈 같았습니다. 바람 부는 날 첫눈 같았습니다. 벚꽃은 해마다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이제 놀라지 않아도 될 나이인데도 실없이 매번 놀라곤 합니다. '아, 한 가지 색으로 저렇게 화려할 수 있다니!' 그 꽃잎들이 아침부터 불기 시작한 세찬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져 마구 날아다녔습니다. 벚꽃잎들이 그렇게 하니까, 재활용품 수집 부대 속에 있던 페트병과 비닐봉지들도 튀어나와서 덩달아 날아다니고 함께 데굴데굴 굴러다녔습니다. 집을 나서서 시가지(다운타운)로 내려가는데 저 편안한 그네에는 몇 잎 앉지 않고, 그네가 싫다면 그냥 데크 바닥에 앉아도 좋을 텐데 하필이면 비닐창에 힘들여 매달린 것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개울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도 물 .. 2022. 4. 16.
외롭고 쓸쓸하면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안토니나 할머니가 예전처럼 칸토 가에서 살고 계실 듯했다. 우리에게 배달된 적십자 엽서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던 할머니는 이른바 전쟁의 시작 직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여전히 금붕어를 매일 부엌의 수도꼭지 아래에 놓고 씻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창틀로 옮겨놓고 신선한 바람도 좀 쐬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긴 문장입니다(창비.. 2022. 4. 11.
"도대체 물이 뭐지?" 젊은 물고기 두 마리가 나이 든 물고기를 지나쳐 헤엄친다. 그들이 지나갈 때 나이 든 물고기가 묻는다. "좋은 아침이야, 젊은이들. 물은 어떤가?" 두 마리의 젊은 물고기는 한동안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물이 뭐지?"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이야기한 우화란다(티나 실리그 《인지니어스 INGEIUS, 리더스북 2017, 89). "도대체 물이 뭐지?" 나는 그렇게 물었던 그 젊은이였다. 2022. 3. 28.
나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있을 땐 이곳 이 시간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지난 시간, 그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시 그곳에서 그렇게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곳 이 시간이 나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앉아 있던 그곳 그 시간이 중심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도 오랜 시간 이곳에서의 나를 떠올리며 그런 시간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곳 어느 시간이 현재이고 과거나 미래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시간 감각 장소 감각이 무디어진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 의식간에 충돌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토성의 고리》라.. 2022. 3. 21.
퇴임 후의 시간들 퇴임 후 나는 힘들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낮에도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도 불안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고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사람이 그립거나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싫었습니다. 그 증상을 다 기록하기가 어렵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러다가 비명에 죽겠다 싶었습니다. 숨쉬기가 어려워서 인터넷에서 숨 쉬는 방법을 찾아 메모하고 아파트 뒷동산에 올라가 연습했습니다. 심장병이 돌출해서 119에 실려 병원에 다녀왔는데 또 그래서 또 실려가고 또 실려갔습니다. 숨쉬기가 거북한 건 심장에는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잊히는 걸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얼른 십 년쯤 훌쩍 지나가기를 빌었습니다(그새 12년이 흘러갔습니다. 누가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겠습니까). 그.. 2022. 3. 15.
'자기소개서' - 내 임팩트의 실상 교장자격강습을 받을 때였습니다. 곧 시험이 시작될 즈음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험이 이제 평생 마지막 시험이겠지요?" 다들 공감했을 것입니다. 그 시간들이 그립습니다. 매일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고 한들 그 시간이 다시 올 리 없고,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나처럼 퇴직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신세인데도 신문에서 입사시험이니 대학입시니 하면 그런 기사에는 눈이 머물게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꼭 7년 전 신문에서 「자소서 '팩트'(fact·단순한 사실)보단 '임팩트'(impact·강렬한 표현)로 승부하소서」라는 기사를 봤습니다(조선일보 2015.3.16.) 작은 제목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취업 좌우하는 자기소개서… 나열은 금물, .. 2022. 3. 7.
몰입의 기술 2015년 1월 18일, 나는 이 신문기사 사진을 휴대전화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러니까 7년 전, 나는 아직도 무엇엔가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40년의 세월에서 그렇게 산 경험도 있고, 그 경험에 대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마음으로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에게 몰입은 마술은 아니어서 저 기사의 '몰입의 마술(魔術)'을 '몰입의 기술(技術)'로 바꾸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마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부르는 건 주제넘은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 몰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고 나는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마 다시 7년이 지나가고 그때도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 2022. 3. 3.
걷기·오래살기 2016년 6월 15일, '파이낸셜뉴스'에서 「하루 15분 걷기 운동만 해도 수명 길어진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15분쯤이면 나도 가능하겠지?' 싶어서 기사를 읽고 댓글란으로 내려갔다가 놀라움과 함께 수치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들 생각하는구나...' 나의 경우 삶의 용기 같은 것이 그런 수치스러움에게 갉아먹히게 되고 그건 예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댓글을 고른 것이 아니고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은 닉을 감춘 것이고, 가령 1시간 전은 댓글 단 시각, ■은 댓글이 '좋다'고 한 사람(엄지를 위쪽으로 든 손), □은 아니라고 한 사람(엄지를 아래쪽으로 든 손)은 아니라고 한 사람 수입니다. ** 그래도 조금이라도 걸어 다니고 운동하는 노인네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맨날 술이나.. 2022. 2. 28.
달빛이 잠을 깨웠습니다 발 사이로 달빛이 들어와 잠을 깨웠습니다. 무슨 증거를 삼으려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W 장학관을 안내한다고 어느 대학 건물에 들어가고 있는데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 손잡이가 칼날 같았습니다. 뭐가 이런가 싶어 둘러봤더니 다른 이들은 손잡이를 잡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강의를 들은 교수를 찾긴 했는데 그는 병 든 모습이었습니다. 그 건물에서 헤매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걸 깨닫고 얼른 내려와 뒤돌아봤더니 건물 주변이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일단 마스크를 사려고 인근 가게로 들어갔다가 무슨 진기한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걸 봤습니다. 그걸 좀 사 먹을까 싶었지만 요령 좋은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주문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 달빛이 나를 깨운 것인데 나는 지금 그렇게.. 2022.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