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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3

코스모스 선물 종일 여남은 명이나 지날까 싶은 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여남은 명 중의 나에게는 이 꽃밭이 과분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딴에는 영욕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여기 이 길에서 나는 저 코스모스 꽃밭이 얼굴 모르는 이들에 대한 선물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하고 싶다는 어려운 과제를 생각했습니다. 2021. 9. 15.
가을비 2021. 8. 31.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겨버렸다 "실례지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군요." "텔레비전에 나오던 분 아닌가요?" 하지만 그런 질문도 잠시뿐이다. 이제 줄리엣은 책을 읽거나, 길가에서 커피를 마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줄리엣을 알아보지 못한다. 짧았던 머리를 다시 길렀지만, 염색 때문에 머리카락은 예전의 윤기를 잃어버려서 은빛을 띈 갈색이 돼버렸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힘없이 흐늘거리고 있다. 마치 생전의 엄마 같다. 부드럽고 찰랑거리던 엄마의 머리칼도 점점 빛바래더니 결국 하얗게 변해버렸다. 초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찾아오는 손님도 뜸해졌다. 그러니 요리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 영양이 충분한 음식이긴 하지만, 매일 똑같은 것을 되풀이해서 먹는다. 딱히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쨌든 점차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겨.. 2021. 8. 23.
이 인생의 길 "너 거기 서! 왜 거기로 다녀?" 개구멍 앞에서 그런 지적을 받으면 당장 뉘우쳤겠지요. 다시는 이 길로 다니지 말아야지. 다른 넓고 버젓한 길을 떠올리며 다짐했겠지요. 잘못은 고치면 되니까요.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하고 편리한 것인지요. 그렇지만 그건 아이들의 특권이죠. 성인의 것, 특히 노인의 것은 아니죠. 인생의 이 길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자네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살았나요?" "왜 그랬어. 이 한심한 사람아!......" 이런 경우 어떻게 합니까? 죽어서 다시 태어납니까?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까? 아니면 항의하거나 적극 변호합니까? "내가 잘못 살아왔다고?"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 2021. 8. 18.
누리장나무에게 누리장나무를 처음 발견한 건 내가 참 쓸쓸한 때였다. '뭐지?' 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냄새가 실망스러워서 전체적 인상은 '꺼림칙한 나무'였다. '내가 여기서 나쁜 냄새를 맡아 더 쇠약해지면 또 드러눕는 수밖에 없겠지?' 악취가 내 심장을 짓눌러 쪼그라들게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나무가 가까워지면 숨을 충분히 들이마신 다음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촬영할 때처럼 숨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가서 더 이상 숨을 참다가는 무슨 수가 날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에 이르러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면서 그 고통으로 헐떡이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이 길이 어떻게 좋은 산책로가 되겠는가. 그 나무는 또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고는 그날 저녁 내내 찾아다니다.. 2021. 8. 12.
답설재의 여름에게 미안하네. 그렇게 쉽게 떠날 줄은 몰랐네. '이 마당에 더위까지...' 그렇게 중얼거린 건, 나이만 먹었지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이네. '팔월 한 달, 구월 초까지는 더 고생할 수도 있겠지?' 그 생각도 미안하네. 그래도 그렇지, 입추 이튿날 당장 떠나는 손을 내미는가. 펼쳐 놓은 건 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2021. 8. 8.
"복숭아가 어떻게 됐다고?" 오십이 넘은 방송인(연예인?) 아무개 씨가 혼인 신고를 했답니다. 연예인 결혼한 일은, 연예인은 우리와 사는 것이 달라서 뉴스가 되는가 보다 하는 편이고, 했거나 말았거나 시큰둥한 것인데 그 아무개 씨의 경우는 왠지 전화로라도 축하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결혼해보면 괜히 했다 싶을 때도 있을 순 있지만 좋을 때가 훨씬 많아요. 어쩌고 저쩌고." 그렇지만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모릅니다. 허구한 날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던 그의 연락처도 모른 채 살고 있다니... 그가 혼인 신고를 한 것은 아내가 먼저 알아냈습니다. 아내는 그걸 가지고 좀 잘난 척하며 내게 알렸는데 처음에 나는 그 전언(傳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내) "○○○이가 @#$%^&*~" (나) "복숭아가 어떻게 됐다고.. 2021. 8. 1.
이제 겨울이 오겠지요 오늘이 유월 보름이고, 그제가 대서(大暑)였네요? 열두 번째 절기. 딱 중간. 더위가 극에 달한다는 날. 오늘도 36도였잖아요. 어떤 덴 37도였지요? 일간 내려가겠지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괜히... 전철역 앞에서 나누어주는 홍보용 부채를 들고 "덥구나" "참 덥구나" 하다가 '안 되겠는데?' 하고 69,900원짜리 선풍기를 하나 샀는데 저녁때 내다본 저쪽 하늘 구름이 가을구름 같아서 '좀 기다려 볼 걸 괜히...' 싶었습니다. 어느 날 서리 오고 찬 바람 불면 '올해 더위도 대단했는데...' 잠깐 생각하다가 그땐 또 그 겨울에 마음을 빼앗기겠지요. 늘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세월이 갔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모든 게 끝나게 되고 아, 그렇다면 늘 그런 건 아니겠네요. 2021. 7. 24.
달에 가서 살겠다 이거지? 일본 과학자들도 달에서 가져온 토양을 연구한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인간이 달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을 연구하는 것이겠지요. 과학자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 일이니 나 같은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긴 하지만 몇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 별(지구)을 버리고 달로 가겠다, 이거지? 이 별에서 살 수 없다는 거지? 그럼, 이 좋은 지구를 망쳐놓은 인간들이 달로 가서 달조차 망치겠다 이거지? 달을 다 망친 다음에는 또 화성으로 간다고 벼르겠지? 도대체 누구 맘대로? 달에 가서 살려면 얼마나 어려울까? 뭐가 지구보다 유리할까? 풍족한 건 뭘까?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환경을 망치는 일을 다 그만두고 이 좋은 세상을 보존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지? 아무래도 지구를 더 개발하자는 사람들을 말릴.. 2021. 7. 19.
구름, 그 하염없음과 덧없음 바라보는 그 순간에는 하염없다. 정지된 듯한 그 시간이 오래오래 그대로일 듯하다. 그러나 얼마나 허망한가. 그 시간은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다. 덧없는 구름, 덧없는 시간. 구름 같은 시간. 2021. 7. 17.
나이드는 것 병드는 것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늙고 병드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나이가 많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더' 혹은 가능만 하다면 오래오래, 그러다가 이 세상이 생긴 이래 유일한 사례로 영영 죽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본능일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한때의 저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이가 이 세상에는 한두 명? 글쎄요., 몇 명일지는 모르지만 전혀 없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오만방자한 생각을 할 때는 죽음이란 주변의 문제이지 결코 저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요양원까지는 가지 않고 조용히, 가족들이 아직은 아니라고 할 때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확실히 노쇠와 사망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어서 남의 일로만 .. 2021. 7. 15.
지난겨울은 행복했지 이만큼 쓸었는데 다시 눈이 내립니다. 올라가서 다시 쓸어내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추위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눈 치우는 도구는 껑충한 대나무 비 하나뿐입니다. 눈이 그치지 않는 것도 걱정입니다. 일간 나가야 하는데 눈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 난감합니다. 사정은 늘 그랬습니다. 언제나 달라지면 더 나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달라져봤자 다 내리막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 두려움 같은 것으로만 다가옵니다. 눈을 다 쓸었다고 해서 마음이 비워지지 않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행복했습니다. 지난겨울은 행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2021. 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