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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누리장나무에게

by 답설재 2021. 8. 12.

 

 

누리장나무를 처음 발견한 건 내가 참 쓸쓸한 때였다.

 

'뭐지?'

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냄새가 실망스러워서 전체적 인상은 '꺼림칙한 나무'였다.

'내가 여기서 나쁜 냄새를 맡아 더 쇠약해지면 또 드러눕는 수밖에 없겠지?'

악취가 내 심장을 짓눌러 쪼그라들게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나무가 가까워지면 숨을 충분히 들이마신 다음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촬영할 때처럼 숨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가서 더 이상 숨을 참다가는 무슨 수가 날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에 이르러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면서 그 고통으로 헐떡이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이 길이 어떻게 좋은 산책로가 되겠는가. 그 나무는 또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고는 그날 저녁 내내 찾아다니다가 밤이 이슥해서 그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옳지! 누리장나무라는 것이구나!'

누리장나무... 이름에 이미 그 냄새가 배어 있는 듯했지만 해로운 냄새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그 냄새가 고약하긴 해도 안심하고 숨을 쉬며 지나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무가 친근하게 느껴진 건 아니었는데 일전에 블로그 "유유자적한 나날"에서 '누리장나무 꽃향기'를 읽으며 내 생각이 어처구니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블로그에는 누리장나무에 대한 인상과 함께 학술적인 내용도 소개되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심지어 '구린내 나무'라고도 부르지만 "비단같이 부드럽고 노을처럼 그윽한 향기"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꽃말이 '깨끗한 사랑'이라고도 했다.

아, 이런! 비단같이 부드럽고 노을처럼 그윽한...

게다가 '깨끗한 사랑'이라니!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유유의 "누리장나무 꽃향기"

                                                                                                            ☞ https://blog.daum.net/jejuyou/3518

 

더위 때문에 산책도 포기하고 지내다가 모처럼 누리장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향기가 정말 '비단같이 부드럽고 노을처럼 그윽'한가, 코를 가까이해보았고 '깨끗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깨끗한 사랑, 깨끗한 사랑......

 

"누리장나무! 미안해. 난 본래 좀 거시기해."

"......"

"짐작하겠지, 내 말? 괜히 내 입으로 나는 천박하다느니 하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A라는 사람이 이 글 읽고 '그 사람 좀 천박해' 하면 B는 한 술 더 떠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나는 그 녀석이 직접 나는 천박해하고 고백하는 걸 다 들었다니까' 하고 떠들어대겠지? 그러니까 그냥 난 본래 좀 거시기하다고만 할게."

"......."

"난 누추하고 쓸쓸해. 어쩌면 그때보다 더 그래. 그러니까 깨끗하고 향기로운 네가 좀 양해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