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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by 답설재 2022. 1. 24.

 

 

엊그제 저녁에 1978년에 담임한 달동네 아이 S가 전화를 했습니다. 57세쯤? 손주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전기공사 일을 한다고 했고, 서울에서 일해 보라는 제의가 왔는데 돈을 엄청 더 벌 수 있고 선생님도 만나볼 수 있을 텐데 '서울 일을 하겠나' 싶더라고, 자신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새 또 한 해가 가서 설을 앞두고 있고, 서너 시간 운전해서 서울 가면 선생님 만나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선생님은 괜찮다 하실 텐데 그것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

J에게서는 자주 전화 오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내게 전화를 하려고 술 한 잔 마셨거나 술 한 잔 하니까 전화를 하고 싶었거나 했을 것입니다.

이제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아이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학교에 가서 아이 담임 선생님을 만나보자 싶어서, 굳이 무슨 얘기를 할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만나보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싶어 찾아와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것입니다. 녀석을 낳아서 대학도 보내고 뜻대로 해보지 못했던 엄마 마음이 오죽했을까, 녀석의 전화를 받으며 생각했습니다.

푸르렀던 날의 나와 S의 어머니만 아는 사실입니다.

그날들의 그 어머니들은 모두 아름다웠는데 이제 그들도 나도 늙어가고 더러 서둘러 이승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손주까지 보고도 연신 "선생님" "선생님" 해서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내 '아이들' 전화를 받으면 걸핏하면 그렇습니다.

내가 힘이 있으면 다 잘 살게 해 줄 텐데......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들은 나이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아이들 가슴속엔 그때 그 누추하지만 누추해도 좋은 날들의 내 모습, 세상 일을 모두 다 알고 거의 마음대로 할 듯한 내 위용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더러 나를 만나보고서도 돌아가서는 또 그때 그 젊은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건 나도 그렇습니다. 더러 그들을 만나보았는데도 그 옛날 오종종했던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지냅니다.

하기야 그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젊은 시절의, 푸르른 날들의 나를 그대로 기억해주는 그것들, 그 아이들...

 

"얘들아, 그러지 말고 좀 잘 살거라, 응!!! 그거 하나만이라도 좀 시키는 대로 해라! 어째 그것조차 제대로 못하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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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림은 내 블친 SONAGI님의 '서울, 우리 동네'(달동네)입니다. 2017년 3월 27일에 이 그림을 탑재하면서 앞으로 생각날 때마다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었고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http://blog.daum.net/sonagi240/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