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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4

나의 노후·사후 십이층 할머니는 내 또래였습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눈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를 휠체어에 태운 그녀의 아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그제야 '우리'(그녀와 나)가 한동안 만나지 못한 걸 알아챘습니다. “가까운 요양원에 모셨는데 오늘 생신이셔서 외출 나왔습니다!” 아들은 가까이 모셨고 외출까지 시켜주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그렇게 설명했고 그런데도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그녀는 눈에 힘이 빠진 채로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하니까 우리는 그만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괜히 그녀를 자주 떠올려보곤 합니다. 정말 괜히! 이층 할머니는 자그마한 키에 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만날 때마다 무슨 얘기든 해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꽤나 곱다고 생.. 2020. 7. 11.
알 수 없는 분노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푸아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함께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면,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이 세상의 아둔함, 더 정중하게는 비논리를 슬플 만큼 경솔한 행동이라고 이해했고, 여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웃으며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231~232) * 소설 『순수 박물관』(오르한 파묵)에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면, (...)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삶의 공허함, 무의미함?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긍정적이었나? 천만에요! 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 생각 .. 2020. 7. 4.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행 정말인지 몰라도 20년을 키우면 주먹만 하게 된다는 마리모 앞쪽으로 넓게 내려다보여서 비행기 조종석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 곳이었습니다. 나는 그곳의 왼쪽, 선생님은 오른쪽에서 1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다 지내놓고 보니까 우리는 서로 옆 교실에 있었습니다. 어떤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곳에 있었다고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1년을 보낸 그곳은 정녕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지낸 교실들은 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을까요? 이제 나는 그곳을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대한 걱정이 깊었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게.. 2020. 7. 2.
김원길 《적막행寂寞行》 김원길 시집 《적막행寂寞行》 청어 2020 시인과 함께하던 그 저녁들로부터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허접하고 시인은 변함 없습니다. 여든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이 이런 것이구나,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빛깔은 이십대 중반의 시인이 보여주던 적막이었습니다. 서정(抒情)의 강물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情)이 아니었습니다. "자, 또 한 편 써볼까?" 하고 술술 써내려갔을 듯한, 낯간지러운 '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마법 그리운 율리아나, 어이 할거나.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여인의 사랑만이 사슬을 푼다는 별난 마법에 걸려 괴물의 몸으로 빈 성에 숨어 사는 이야기 속 딱한 왕자. 율리아나, 그대 또한 멀리 외져 발길 없는 숲속 궁전, 백 년을 옴짝 않고 누워 잠자.. 2020. 6. 28.
시계 고치기 1 대개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입니다. 나도 저것들도 결국 허접해졌습니다. 나처럼 처음부터 허접한 것도 있었습니다. 허접한 나는 일쑤 허접한 그것들을 만집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0점 조정하듯 시간을 맞추고 게으름을 피운 침이 있으면 강제로(시침이 게으름을 피웠다면 분침을 붙잡아 고정시킨 채로) 좀 돌려주는 정도입니다. 건전지만 갈아 끼우면 되는 시계인데도 추가 달려 있으면 수평도 잡아줍니다. 기껏 그 정도지만 누가 보면 '이상하네. 허접한 사람이 저걸 고치네' 할 것입니다. 곤혹스러운 일은 시계 고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결코, 단 한 번도 시계를 고쳐놓은 적이 없습니다. 꿈이 시작되면 ‘아, 또 이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합니다. 가만 두었는데도 부속품들이 와르르 쏟아져 산산이 .. 2020. 6. 25.
《다른 색들》Ⅱ 나는 왜 읽는가?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8 어떤 결핍감, 어떤 불충분함.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용기를 내어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휘스레브와 쉬린이 사랑을 위해 떠난 여행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를 완성시킬 '타자'를 찾는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더 배후에 있는, 더 중심부에 있는 것을 향한 여행. 아주 먼 곳에 어떤 실제가 있다. 누군가가 이를 우리에게 말했고,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으며, 그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문학이란 이 여행 이야기다. 나는 이 여행을 믿는다. 하지만 어디 먼 곳에 중심부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것을 불행이라고도, 낙관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쉬린의 어리둥절함'이란 에세이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쉬린은 천하일색의 아르메니아 공주.. 2020. 6. 18.
언년이의 죽음 언년이가 죽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어보기도 그렇고 찾아가 볼 용기도 없지만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았다. 언년이를 괴롭혀오던 거시는 며칠 전 모조리 축출되었는데도 언년이가 죽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언년이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 말에 따라 작심하고 장날 그 핑크빛 회충약 1인분을 사다 먹였고, 언년이는 음식물 찌꺼기는 눈 닦고 봐도 보이지 않는, 순전히 하얀 거시만 소복하게 세 무더기나 쏟아냈다고 했다. 언년이가 쏟아냈다는 거시 세 무더기를 내가 직접 보았던가? 본 것 같다. 거시 무리가 서로 속으로 들어가려고 우글거리는 모습, 착하게 살아가는 척 위선을 떨다가 지옥 바닥에 떨어진 인간들이 벌거벗고 우글거리듯 혹은 수십 마리 뱀이 뒤엉켜 축구 공보다 더 크고 둥근 덩어리를 이룬 채 잠시도 .. 2020. 6. 16.
쓸데없는 기억 내 왼쪽 발등 바깥쪽 부분에는 대여섯 살 적의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논두렁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동네 형의 송곳에 찔려서 생긴 상처가 겨울 내내 아물지 않아서 생긴 검붉은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나쁜 인간이 아니었고,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의 사촌 누나 한 명과 결혼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이 상처의 흔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고 마침내 이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가 영영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그 흔적을 보여주며 얘기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써먹을 수도 없는, 쓸데없는 기억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저승으로 간 사람이 생.. 2020. 6. 2.
2020 봄 저기 새로 돋은 나뭇잎들 좀 봐! 벌써 저렇게 활짝 폈네. 이제 어쩔 수 없지. 저걸 무슨 수로 막아. 그냥 두는 수밖에…… 2020. 4. 29.
속절없는 나날들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줄은 잘 압니다. 이곳에 눈이 내리던 저 날만 해도 사태는 시작에 불과했고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습니다. 남은 게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정말 뭔가 좀 해야 할 처지인데 오늘도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재깍거리고 똑딱거리는 시계가 원망스럽습니다. 이 방에만 해도 세 개인 시계가 우습게 보입니다. 뭘 하겠다고 시계를 모아 두었을까? 시계가 여러 개이면 시간을 조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 시간이 좀 늘어나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걸까? 변함없이 저렇게 재깍거리고 똑딱거리는 저 시계를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안부 전화로, 자랑처럼,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던 K 교수가 '알파고'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을 정복한 사나이 .. 2020. 4. 15.
진달래 1 산길에서 진달래를 만나는 이 나날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처음엔 '또 진달래가 피네' 했습니다. 오늘은 또 생각했습니다. '다 피고 나면 어떻게 하나?' '봄이 다 가면 그때는 그럼 어떻게 하나?' 2 195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득한 그 어디쯤에서 진달래 꽃잎을 따먹고 있으면 입술이 새빨간 사람에게 잡아먹힌다고 했습니다. 내 빨간 간을 내가 보는 데서 꺼내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입술 붉은 그 사람은 분명 병자(病者)이니까 성치는 않을 그 몸으로 주춤주춤 다가오면, 미끈거릴 고무신을 얼른 벗어 들고 뛰어 달아나면 그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달래 꽃잎 좀 따먹지 않고는 힘이 너무 들었는데, 그렇지만 입술이 퍼렇도록 그걸 따먹어도 배는 점점 더 고팠.. 2020. 3. 31.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유엔, 이건 내 체질이 아니야. 그저 떠드는 것, 항상 떠드는 것뿐이라니까. 나란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이해심 깊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네 하루는 어땠니?」 「항상 그게 그거.」 「학교에서는 1등, 발레에서는 별로 빛을 못보고?」 「응. 하지만 나는 무용가가 될 거야.」 「물론이지.」 아버지는 그냥 말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내가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걔는 나를 닮았거든.」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배고픔의 자서전』의 한 장면입니다.* 이 산뜻한 대화를 읽고 한참 동안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부러웠고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악당들도 임자를 만날 때가 있다. 지금도 기억난다. 언젠.. 2020.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