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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복희 「밤비에 자란 사람」

by 답설재 2025. 3. 24.

도깨비는 노래 좋아하고 빛나는 것 좋아하고 수수팥떡을 좋아해 도깨비는 힘이 장사고 긴 밤이든 짧은 밤이든 노는 것이 좋아 씨름 잘하는 둥근 어깨를 가졌을 것만 같아요 말라깽이 도깨비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

타령 시작하자마자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는

도깨비 지나갑니다

 

지나갑니다

심심하면 나랑 씨름합시다

가방 추슬러 올리며

 

도깨비 휘청 말라 고속버스터미널 유리문 어깨로 밀며 야윈 나뭇잎과 마른 잔디 사이로 지나갑니다 가방만 보이는 것 같다 방심하지 마세요 도깨비 대신 말해주고 싶네요 지나갑니다 계절 지나갑니다 이대로 떠나기에 마음 요란해

계절 바뀔 때

더 아픈 사람들,

아프면 많이 바쁠 텐데요

 

도깨비도 바빠요 막걸리 좋아하고 먹성도 좋아

전국 방방곡곡 안 가는 곳 없이 돌아다닙니다

 

지나갑니다

아픈 사람들 밤새 기침하잖아요

글쎄 잘 들어보세요 도깨비

비 맞은 중처럼 기침 따라 후렴하는데

 

왜 모른 척하나요

노래 좋다 해주시면 좋아할 텐데

앓느라 힘드시면 속으로라도

감탄해주시지

 

밤비에 자란

야윈 도깨비

오래오래 천천히 자랐답니다 그러느라

감투도 방망이도 잃어버렸지만 가방은 있답니다 흘러내린 가방 금은보화 정말 들었나 붙들지 마세요 열어보면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 들어 있을 텐데요 당신도 모르는 당신 원하는 것! 도깨비는 내기 좋아합니다 당신을 걸고 씨름을 해야 한다고 가방에서 하루 꺼내주겠다고 도깨비는 언제나 씨름할 마음 만만 장난칠 마음 만만!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샅바를 잡아야 할 텐데요 아프면 도리 없죠 고단하죠 씨름이 다 뭔지 일어나기도 힘들 수 있을 텐데요 그러나 도깨비 조화로 힘날 겁니다 보세요 아픈 계절 사라지고 도깨비불 무성한 날 가방 안에서 봤나요 그때도 씨름 중이면 좋겠네요 가방 속 당신이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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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2015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희망은 사랑을 한다』『스미기에 좋지』. 〈현대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이신율리 시인이 추천해준 "한국요괴도감(고성배 지음,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2019) 표지화

 

 

 

이 시를 읽으면 도깨비가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언제든 어디서 좀 만나도 좋을 것 같은, 만나면 좋을 것 같은 그런 존재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보다는 아무래도 이미 만났었지 싶은 느낌이다.

그때는 내가 알아맞혀야 할 도깨비라는 걸 모르고 여느 사람인 줄 알고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만났지 싶고, 그게 확신이 되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나답지 못하지만 그날들의 나는 더욱 나답지 못했었다. 한시도 나답게 살지 못한 것이다. 그 도깨비는 그걸 알았을 것이다. 다만 안타까워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그때 그는 그랬겠지. "살아봐야 한다. 그럼 가슴 아파하며 나를 기억해 내고 뒤늦게 그리워하겠지."

"그래, 그렇긴 해. 지난밤 한 차례 밤비로 모든 게 다 지나간 것 같아. 이제 한 차례의 봄이 지났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어느새 여름 가고 저문 가을인 것 같아. 나의 지난 일들이 그런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