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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답설재 2019. 3. 6.

신형철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꺠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이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

 

 

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정작 내가 지닌 이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공부하는 슬픔이 다시 그 슬픔 만큼의 무게로 더해진다 한들 어떠랴. 그 무게로 무너져버린다 한들…….

말하지 않고 지낸 이 슬픔에 마침내 말할 수 있는 슬픔이 더해진다 해도 그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슬픔의 얼굴을 본 후에 떠나고 싶었다.

 

· 슬픔에 대한 공부(슬픔)

· 삶이 진실에 베일 때(소설)

· 그래도 우리의 나날(사회)

·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시)

·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문화)

 

 

3

 

나는 이 책이 슬픔에 관한 에세이로만 되어 있는 줄 알았다.

'타인의 슬픔'이란 것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공부하는 '슬픔'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이 슬픔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202, '사회' 편에서)

 

고통의 경험, 타인의 고통, 고통의 공감…….

 

나는 이 문장을 읽은 '그때'로부터 문학하는 학자의 '산책'을 따라다녔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즐겁게.

그러므로 나의 슬픔은 '얹어놓고' 읽었다. '얹어놓고', 그것은 언제나 그랬다.

 

길지 않은 글들이고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책(소설, 시) 소개가 많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글들도 읽을 수 있었다.

 

 

4

 

사랑에 관하여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고 또 부끄러워 대개는 감춥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를 발견하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결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너)만이 너(나)의 결여를 이해하고 또 보듬을 수 있다는 확신에 함께 도달하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만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에 의해 시작되는 관계가 꼭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상대방이 가진 것에 매혹되면서 관계가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상대방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이해로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질 때에만,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340~341)

 

이것은 나에게는 '실천'의 문제이다.

 

어떤 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149)

 

이것은 다만 '이해'의 문제이다.

 

 

5

 

장년층·노년층에 관하여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 따르면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그냥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고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라는 것. 한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31쪽) 우리 사회가 장년층·노년층을 사회적 인정의 장에서 배제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삶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거대한 발전소를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기만 할까.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서도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날들이다.(211)

 

이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