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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by 답설재 2019. 5. 1.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1

《모든 것은 빛난다》 ALL THINGS SHINING:

Reading the Western Classics to Find Meaning in a Secular Age

김동규 옮김, 사월의책 20

 

 

 

 

 

 

1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보았을 뿐

2007년 1월 2일은 따뜻했다. 그 주에 나온 신문들은 뉴욕 브루클린 식물원의 싱그러운 벚나무들에 꽃이 만발했다고 보도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여든 시민들로 봄의 희망찬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러나 점심시간 직후 맨해튼 브로드웨이 137번가 지하철 승강장에는 눈 깜박할 사이에 봄기운이 사라졌다. 스무 살의 영화학도 캐머런 홀로피터가 땅바닥에 고꾸라져 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 남자와 두 여자가 그를 도우러 달려왔다고 한다. 그들의 도움으로 홀로피터는 그럭저럭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승강장 가장자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가 이내 지하철 선로 위로 떨어졌다.

그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봄기운에 누그러진 뉴욕을 술렁이게 했다. 쉰 살의 건설노동자 웨슬리 오트리가 맨 먼저 홀로피터를 도우러 뛰어들었던 것이다. 어린 두 딸, 네 살짜리 시쉬와 여섯 살짜리 슈키를 승강장에 멀찍이 남겨둔 채였다. 1호 열차의 전조등이 나타났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2 오트리 자신은 그가 영웅이 아니며 보통사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뿐입니다."(15~17)

 

 

2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의 '소동'에는 오늘날 이 사회의 관점(철학)들이 스며 있다.

 

웨슬리 오트리는 신문들로부터 "지하철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대중지들의 폭발적인 반응도 누렸다. 정치인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이려고 몰려들었고, 학자와 문화비평가들은 그의 행동이 보통사람들보다 "영웅주의에 더 깊이 젖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오와 주의 더뷰크 같이 작은 마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미덕과 배려의 태도가 뉴욕이란 대도시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인지에 관해 토론했다. 몇몇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축하며 그런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오트리처럼 했을 거라 주장했고, 근엄한 경찰청장은 주위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오트리를 본받아 행동하라고 뉴욕 시민들에게 조언했다.(16)

 

 

3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웨슬리 오트리가 위험에 처한 사람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확실성("단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뿐")을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에서 발견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신이 사라진 자리(신이 죽어버린 자리3, 신을 추방한 자리4, 신이 몰락한 자리5)에 허무,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퓌시스적 성스러움은 오늘날 우리 문화의 주변부에서 여전히 유용하지만, 우리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성스러움은 아니다.(376)6

우리는 퓌시스 외에도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376)7

성스러움에 대한 이런 이해에 덧붙여서, 우리는 또한 세계에 대한 테크놀로지적 이해도 가지고 있다.(377)8

 

 

4

 

퓌시스적 성스러움,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 테크놀로지적 이해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나?

메타 포이에시스, 즉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혹은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설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적시에 구분해내는 기예는 어떻게 계발할 수 있나?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지닌 다차원적인 성스러움들 속에서 사는 장인은 어떤 순간에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 감사의 축제가 필요한지를 반성 없이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열광적인 스포츠의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동시에, 광적이고 위험한 선동가의 웅변에 이끌리지 않도록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사물들에 조율되어 있으며, 따라서 신들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열어두고 있다.(374)

 

 

5

 

'산 넘고 물 건너'

허무와 무기력을 앓는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기 위한 철학적·문학적 고찰을 따라다니는 길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다.

- 선택의 짐

  •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신들로 가득한 세상(호메로스의 세계)
  • 유일신의 등장(아이스킬로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단테에서 칸트까지)
  • 광신주의와 다신주의의 사이(멜빌의 '악마적 예술')
  •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보기 드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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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Hubert Dreyfus and Sean Dorrance Kelly


2.블로거 '파란편지'가 진하게 나타낸 부분.


3.니체.


4.멜빌.


5.마르틴 부버.


6.- 호메로스의 단어 '퓌시스 physis'룰 번역한다면 '반짝임'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 호메로스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반짝이는 것이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빛나는 아킬레우스의 반짝임, 또는 파리스처럼 멋진 이국남자의 등장에서 보는 에로티즘의 반짝임, 소용돌이치는 바다에서 오디세우스가 손을 뻗어 잡으려 했던 바위의 반짝임.(345)


7. -포이에시스poiesis, 장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것은 여러모로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354) - 예를 들어 야구나 테니스 기술 또는 피아노 연주기술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수된다.(354) - 하나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355) - 성스러움에 대한 이런 포이에시스적 이해는 여러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세계가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정조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는 예수적 의미를 띨 수도 있고,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의 수용적 능력을 우리 스스로 기를 수 있다는 단테적 의미를 띠고 나타날 수도 있다. 또는 모든 미성숙한 힘들에게도 적합한 자리매김을 해줌으로써 문화를 최선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스킬로스의 의미를 띨 수도 있으며, 아니면 자연이 이미 지니고 있는 성스러운 가치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스터트의 의미를 띨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든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의 개념은 따뜻한 양육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낯선 것이었다.(377)


8.-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생산하고 통제하도록 해주는 이해 방식이자 사물에 대한 효율적이고도 영리한 이해 방식이다. 때때로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점도 내적인 가치도 없지만, 우리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주조될 준비가 되어 있는 세계이다.(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