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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에밀 졸라 《나나》

by 답설재 2019. 5. 21.

에밀 졸라 《나나》

김치수 옮김, 문학동네 2014

 

 

 

 

 

 

어느 저명한 평론가가 남우세스러운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나나』 그리고 『목로주점』.

'남우세스럽다고?'

'그래~? 얼마나?'

그 글을 본 다음 달이었던가, 다다음달이었던가, 에밀 졸라의 그 작품들을 소개한 평론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글쎄, 남우세스럽다고? 이 정도를?……'

 

 

1

 

파리의 문단, 재계, 유흥업계가 거기에 있었다. 수많은 신문기자, 작가 몇 명, 증권거래소 직원, 여염집 부인보다 수가 더 많은 유흥가 여자들도 있었다. 온갖 재능으로 이루어지고 온갖 악덕으로 더럽혀진, 기묘하게 뒤섞인 세계였다.(20)

 

객쩍은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백여우'가 재주를 넘고 나서 그곳, 그러니까 파리의 바리에테 극장에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 얘기입니다. 아주 예쁜 여자가 위선적 인간들(주로 남자들)을 작살내버립니다.1 작살내는 정도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아주 요절을 내버리는 얘기'라고 덧붙여도 좋겠습니다.

 

모계와 부계가 대대로 알코올 중독자인 나나는, 머리가 둔하고 목소리도 시원치 않지만 연극 〈금발의 비너스〉 개막공연에서 육감적 미모와 음란한 나체 연기로 순식간에 파리를 휩쓸어버립니다. 타고난 육체적 매력이 요즘 말로 하면 '여신의 대표'여서 파리 사교계를 '완전' 지배해버린 것입니다.

 

"오, 맙소사! 그녀는 아주 오동통하더군. 한입에 넣고 싶더라고."(29)

 

수정 동굴 안에서 나타나던 나나의 풍만한 육체는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그녀에게는 대사 한 마디 없었다. 말을 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며 원작자들이 대사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게 더 좋았다. 그녀는 모든 관중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몸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 아름다운 어깨. 다리. 허리. 그런 육체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586)

 

 

2

 

'육체의 악마'인 그녀는 나태·사치·방종·쾌락의 상징인 한편 순진하고 순수한 여성성까지 겸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걸핏하면 거리에 몸을 팔러 나가는 그 음탕함 때문인지, 아무리 근엄한 남자라도 한 번 걸려들면 옴짝달싹을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몰락? 그 정도 표현으로는 단조롭습니다. 전락, 타락, 탕진, 파산, 파멸…… 소년에서부터 늙은이까지 정신을 잃어버리고 명예와 부와 목숨을 송두리째 갖다 바칩니다.

 

등장인물 약 50명 중 여성(그들 중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정조를 지킨 여성은 몇 명이나 될는지……)을 뺀, 그러니까 남성들 중 누가 그대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못 생기고 바보처럼 보였는데 동거하게 되자 그녀를 휘어잡은 3류 배우 퐁탕, 알코올 중독자 보스크 영감, 늙은 배우 프륄리에르, 한 탕 해 먹고 달아난 마부, 집사, 요리사, 시종, 그 외에 누가 나나에게 얽혀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대 1학년생 조르주 위공이 그녀 때문에 죽고 그의 형 필리프 중위가 타락하고 방되브르 백작이 자살하고 유태계 금융인 스타이너가 몰락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라 팔루아즈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신세가 되고 기자 포슈리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슈아르 후작이 짐승으로 변하고 그의 사위이자 튀일리궁 시종장인 뮈파 백작이 철저히 망가집니다.

 

그들이 나나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힌다는 것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었습니다. 가장 자주 등장한 뮈파 백작의 굴종 장면 중 한 곳을 골라봤습니다.

 

일단 침실에 들어가면 현기증이 그를 취하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 문지방을 넘어간 숱한 남자들도, 그 문지방에 여전히 잠재해 있는 죽음의 슬픔도 밖에 나오면 가끔 길 한가운데에서 수치감과 반항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여기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 다시 포로가 되어 그 방의 따뜻함에 녹아들었다. 자신의 육체가 향수 냄새에 젖어들고, 온몸이 자지러질 듯 육감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았다. 장엄한 성당에서 도취감에 잠길 줄 아는 독실한 신자인 그는 채색 유리 밑에 무릎을 꿇고 오르간 소리와 향로 냄새에 취할 때 신자로서 느끼는 감동을 거기서 그대로 맛보는 것이었다. 나나는 분노의 하느님, 질투심 많은 하느님처럼 그를 소유하고 두렵게 했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눈앞에 그리며 몇 시간 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나면 그 대가로 경련 같은 한순간의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와 똑같은 탄식이며 기도이며 절망이었다. 특히 원죄의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저주받은 인간의 비참함과 똑같았다. 육체의 욕망과 영혼의 욕구가 서로 합쳐져 존재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560~561)

 

 

3

 

그렇지만 영원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름답고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하고 남자를 굴복시키는 데 능수능란하던, 성적 일탈과 쓸데없는 탐욕과 정서적 불균형에 사로잡혀 살아온 나나는 보불전쟁이 일어나 거리가 떠들썩한 어느 날 천연두에 걸려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시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밝은 빛이 갑자기 죽은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소름이 끼쳤다. 모든 여자들이 몸을 떨고 밖으로 나갔다.

"아! 그녀는 변했어요. 많이 변했어요." 로즈 미뇽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중얼거렸다.

그녀도 나왔다. 그녀는 문을 닫았다. 나나만이 홀로 밝은 촛불 아래에서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송장이었고, 피와 고름 덩어리였고, 쿠션 위에 던져진 썩은 살덩어리였다. 작은 고름집들이 얼굴 전체를 뒤덮었고 뾰루지들이 엉켜 있었다. 퇴색하고 문드러져서 진흙덩이처럼 회색이 된 고름집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반죽 같은 얼굴 위에 핀 곰팡이 같았다. 거기서 옛 모습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었다. 왼쪽 눈은 완전히 곪아 푹 꺼졌다. 반쯤 뜬 오른쪽 눈은 썩은 구멍처럼 시커멓게 파여 있었다. 코에서는 아직도 고름이 흘렀다. 뺨을 덮은 불그스름한 짝지가 입 언저리까지 떨어져나왔는데, 거기에는 기분 나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얼굴 위로 머리칼이, 그 아름다운 머리칼이 햇빛처럼 찬란한 불꽃을 지닌 채 황금의 개울처럼 흐르고 있었다. 비너스가 썩은 것이다. 시냇가에 버려진 내성 강한 시체에서 그녀에 의해 채집된 바이러스가, 그녀가 민중을 망쳐놓은 그 효소가 그녀 자신의 얼굴로 옮겨와 그녀를 썩게 만든 것 같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절망적인 커다란 고함소리가 큰길에서 솟아올라 커튼을 부풀렸다.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601, 끝)

 

 

4

 

대개 그랬으므로 주인공인 나나를 옹호하며 읽고 싶기가 쉬운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타락, 이 방종이 어디까지 가는가 보자, 어쩔 수 없으므로 되는대로 따라가 보자, 어떻게 되는지 보자며 읽었습니다.

나에게 이런 잔인함이 스며 있구나 싶었습니다. 혹 그렇진 않다면 에밀 졸라의 냉혹한 관찰과 치밀한 묘사에 넋을 잃었던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