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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오한기(단편소설) 〈25〉

by 답설재 2019. 7. 8.

 

 

 

   오한기(단편소설) 〈25〉

『현대문학』 2019년 6월호

 

 

 

내가 나 자신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혹독한 배신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그 순간에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그 생각만 했습니다. 그걸 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아픈 채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경우 돈이 들어간다는 기사도 보았지만 말 못 할 사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으면 싶다는 순간을 어찌할 수는 없어서 그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한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어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아닌 인물, 그러니까 동명이인(同名異人)들에 대한 정보가 우르르 쏟아지는 걸 보면 좀 섭섭하기도 하지만('나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그 참…….'), 여기까지 와서 유명하다고 더 나을 게 있겠나 싶어서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신분 세탁(신원 세탁?)을 소재로 한 소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오는 정신분석의를 찾아가서 오영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펑펑 울었다. 정신분석의는 1년 차 직원이 겪는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진단했다. 의뢰인으로 따지면 혼란기죠. 이 세상이 오영을 잊고 있는데, 당신이라고 오영을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일종의 자동반사가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죠. 직원들 대부분 당신처럼 힘들어했어요. 전생과 밀고 당기기를 하는 와중에, 작별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발현되거든요. 거의 다 왔어요. 시간은 이오의 편입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이오의 삶에 몰두하세요. 진정한 이오가 되면 오영은 이사 온 이웃처럼 자연스럽게 당신 앞에 나타나서 악수를 청할 거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럼 당신도 인사를 건네고, 가끔 마주치면 안부나 물으면 돼요.3

 

오영은 이오로 '변신'하는 데 필요한 경비 때문에 그 세탁 회사 직원으로 들어간 경우입니다.

세탁은 가령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나는 일사(14)로, 인사위원회 소속 조사원이다. 잠재적 위험 요소인 문제 직원의 행적을 조사하는 게 주 업무다. 오영에 관해서는 사찰 보고서와 지터의 블로그를, 이오에 관해서는 정신분석의 상담 일지, 미행 일지, 도청 녹취록, CCTV를 참고했다. 전산팀의 협조로 이오가 「드래프트」에서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이오의 생각이나 느낌은 행동을 통해 유추하거나 축적된 데이트를 통해 추론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으면, 이오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 글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일종의 보고서이며, 이오와의 계약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최근 사외이사를 선임한 인사위원회 요청에 따라, 파인클리닝과 이오(오영)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도 이해 가능하도록 작성 중이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영영과 협의 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오의 입장도 최대한 반영하고 있으니 참고 바란다.4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게름직한 느낌? 그걸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삭막한 세상이니 어떠니 하고, 사이버 세상에서의 친교와 오프라인에서의 친교가 서로 다르니 어떻니 하고 있지만, 미구에 지금 이 시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따라 아무래도 저 오한기 소설가의 소설에 한 표를 주는 게 마땅하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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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기  1985년 경기도 안양 출생. 동국대 문창과 졸업. 2012년 『현대문학』 등단. 소설집 『의인법』.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 『나는 자급자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