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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슬픔21

이장욱 「원숭이의 시」 원숭이의 시 이장욱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 2017. 8. 31.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백 가지 슬픔의 문〉 《백 가지 슬픔의 문》 The Gate of the Hundred Sorrows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이종인 옮김, 『현대문학』 2017년 3월호 114~123 풍칭은 왜 그 집을 "백 가지 슬픔의 문"이라고 불렀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그는 내가 아는 한 발음하기 어려운 괴상한 이름을 사용하는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대부분의 이름들은 화려했다. 이것은 캘커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화려한 이름들을 직접 확인하곤 했다.1 아편 파이프를 석 대 피우고 나면 베개의 용들이 서로 움직이면서 싸우기 시작한다. 나는 수많은 밤 동안에 그 싸움을 구경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연기 양을 조정했고, 이제 열두 대를 피워야 용들이 움직인다. 게다가 이 파이프.. 2017. 4. 27.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코스키의 말년 일기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Henry Charles Bukowski 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1998) 찰스 부코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모멘토 2015 1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1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 2017. 2. 14.
알랭 푸르니에 《대장 몬느》 알랭 푸르니에 장편소설 《대장 몬느 Le Grand Meaulnes》 김치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7 # 아늑한 농촌 마을 생트아가트에 모험심 강한 미소년 오귀스탱 몬느가 나타난다. 그는 나약하고 감수성 강한 프랑수와 쇠렐의 청년기를 뒤흔들어놓았다. 몬느는 '잃어버린 영지'를 찾아가는 모험으로 프란츠 드 갈레를 만나게 되고 그의 여동생 이본 드 갈레와 결혼하게 되지만, 프란츠는 그의 이상형 발랑틴과 맺어지지 못한다. 몬느는 이번에는 처남 프란츠를 위해 발랑틴을 찾아나서는 모험의 길을 떠나고 혼자 남은 이본은 딸을 낳으며 목숨을 잃는다. 쇠렐은, 이제 이본이 낳은 아이를 돌보며 행복해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몬느에게 그 딸을 돌려준다. # 잃어버렸거나 사라져버린 그 시절, 내 곁에도 '대장 몬느'가 있.. 2016. 10. 27.
다시 그 비둘기! "왠 일이야? 이 위험한 곳에?" "……" "추워서? 예년에 비하면 그리 추운 것도 아니라잖아?" "……" "음…… 배가 고픈가? 이런 곳에 뭐가 있겠어?" "……" "근데 왜 혼자야? 그때 짝꿍이 자동차에 치여 죽은 후로 내처 혼자 지낸 거야?" "……" '소리없는 슬픔' ☞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462 "상봉역이나 청량리역 같은 곳에는 많던데…… 그런 곳에 가서 새 짝을 찾아보는 게 어때?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냐?" "비둘기들이 많고 어수선해 보여서 그런 생각하는 것 같은데 걔네들 다 짝 있어." "……" "……" "많이 위축된 것 같네? 모이나 제대로 찾겠어?" "그냥 와 본 거야……." "행운을 빌게. 우선 건강해야 해. 살아남아야.. 2016. 1. 19.
이생진 「칼로의 슬픔」 칼로의 슬픔 칼로*의 그림 앞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칼로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다 허나 그녀는 칼날 같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네가 뭔데? 간섭하지 마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고흐의 '슬픔'만 슬픔인줄 알았는데 칼로의 슬픔은 그보다 더하다 화살이 박힌 상처에서 피가 흘러도 칼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고흐는 면도로 귀를 잘랐고 칼로는 수술대에서 다리를 잘랐다 고흐는 권총으로 가슴을 쐈고 칼로는 눈으로 자기를 쏘는 자의 가슴을 쐈다 결국 그들의 눈에 담고 간 것은 그들이 그리다 간 세상이다 고독의 아픔 그들의 고독에서 피가 난다 *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의 화가 (2015.7.22) 여름이 시작될 무렵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을 보았습니다. 블.. 2015. 9. 3.
El Condor pasa El condor pasa 'El Condor pasa'…… 상봉 전철역에서, 저 악사가, 혼자서, 정말로 중앙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 어느 곳, 아니면 바로 그 마추피추 골짜기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모습으로, 께나와 두어 가지 악기를 더해서 잉카의 '슬픔'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넋을 잃고 턱하니 앉.. 2012. 11. 13.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Ⅰ B. 파스테르나크『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지난여름 참 좋은 어느 선생님이 이미 절판이 되었다는『닥터 지바고』 음반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걸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걸 들으면 음반을 구해준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만큼은 아니라 해도 짧은 시간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기에는 좋을 음반입니다. 지난 11월 11일에 베이징에 갔었는데, 마침 폭설이 내리는 걸 보며 그 소설과 영화가 떠올랐고, 13일 오후에는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인민교육출판사 직원이 티벳까지 간다는 칭짱열차 이야기를 해서 또 그 소설과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세 번을 봤습니다. 감동적이어서 세 번씩이나 봤다기보다는 "감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1968년엔가 처음 봤는데, 지금.. 2009. 12. 29.
가을엽서⑴ 아무래도 가을인가 봅니다. 이 저녁에는 또랑또랑하고 낭랑하게 들려오는 풀벌레소리가 내 이명(耳鳴)을 잊게 했습니다. 이명은 지난해 여름 그 한의사가 이제는 친구처럼 대하며 지내라고 한 가짜 친구입니다. 입추(立秋)가 지나도 등등하던 더위의 기세가 뒤따라온 말복(末伏) 때문이었는지 하루식전에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럴려면 그렇게 등등하지나 말 일이죠. 새벽이나 이런 밤에는 벌써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그곳은 어떻습니까? 그곳도 여름이 가고 스산하고 까닭 없이 쓸쓸합니까? 며칠 전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현관을 들어서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가을이네.' 별 생각 없이 그렇게밖에 하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눈시울이 젖을 뻔했습니다. 알래스카의 그 추위 속에서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는 것을 본 호시노 미치오.. 2008.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