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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을엽서⑴

by 답설재 2008. 8. 25.

 

 

 

 

아무래도 가을인가 봅니다. 이 저녁에는 또랑또랑하고 낭랑하게 들려오는 풀벌레소리가 내 이명(耳鳴)을 잊게 했습니다. 이명은 지난해 여름 그 한의사가 이제는 친구처럼 대하며 지내라고 한 가짜 친구입니다.

 

입추(立秋)가 지나도 등등하던 더위의 기세가 뒤따라온 말복(末伏) 때문이었는지 하루식전에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럴려면 그렇게 등등하지나 말 일이죠. 새벽이나 이런 밤에는 벌써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그곳은 어떻습니까? 그곳도 여름이 가고 스산하고 까닭 없이 쓸쓸합니까?

며칠 전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현관을 들어서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가을이네.'

별 생각 없이 그렇게밖에 하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눈시울이 젖을 뻔했습니다.

 

알래스카의 그 추위 속에서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는 것을 본 호시노 미치오는 왜 이러한 자연의 질서가 인간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을까요? 그는 20여 년 간 카메라로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들을 시(詩)처럼 표현하고, 43세 때(1996년) 캄차카 반도 쿠릴 호반에서 잠을 자다가 불곰에게 물려죽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이규원 옮김,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청어람미디어, 2005).

 

"모든 것이 작년과 똑같다.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정말로 반복되어간다.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하고는 무관하게……. 자연의 질서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는지도 모른다."

 

여름에 이곳에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저 아래 큰길가 10층 '송추골'이라는 식당에서 이곳 산야와 마을을 내려다보며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여름이 내게는 채워지지 않은 계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무턱대고 기다리기가 어려워서 '좋은 일 있거나 마음 가벼우면 당연히 연락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번에는 '그럼 마음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 걱정도 못마땅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언젠가 내가 그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로 혹 마음 불편한 일 있으면 그것도 세월이 가면 다 바뀌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모두들 그런 것 같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평생 교원으로 살아온 나를 보시면서 단조롭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느끼실 수도 있지만, 나도 사실은 모든 일 참고 견디고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아무라도 속으로 삼키고 사는 눈물이 열배, 백배는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게 생각하면, 이 가을이 우리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슬픔도 다 묻어주며 가고 오는 것이 세월이고 자연의 질서가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로서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이 길목이 참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그러므로 부디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