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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궁사 박성현·윤옥희·주현정이 펼친 드라마

by 답설재 2008. 8. 18.

 

궁사 박성현·윤옥희·주현정이 펼친 드라마

- 베이징 올림픽 관전 단상 ⑴ -

 

 

 

베이징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은 아무래도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억울함이, 박성현․윤옥희․주현정 세 궁사를 향한 것인지, 중국측의 태도 때문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왠지 모를 억울함이 차오릅니다.

 

8월 10일의 단체전에서는 비가 오거나말거나 세 궁사가 홈팀 중국을 224:215로 누르는 감동의 드라마를 펼쳤습니다. 이날도 중국측은 연이어 10점을 쏘아대는 한국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응원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신문의 사진 아래에 이런 설명이 붙었습니다. “한국 양궁은 악천후와 중국 관중의 소음작전을 뚫고 남녀 단체 모두 금메달을 쏘았다. 11일 베이징 올림픽 그린양궁장에서 한국 응원단 1000여 명이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응원단은 한국에서 건너간 펜들과 현지교민, 유학생으로 구성돼 선수들이 고비에 빠질 때마다 뜨거운 격려를 보냈다.”

 

기사 제목은 “神人 한국 女양궁에 고개 숙여라”였고, 기사 내용은 “중국 반관영통신인 중국신문망은 시위를 당길 때마다 골드에 적중하여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선수들로 올림픽 6연패를 달성한 한국 여자 양궁팀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미국의 수영스타 마이클 펠프스와 미 프로농구(NBA) ‘리딤(redeem)팀’과 함께 최고의 선수, 최고의 팀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또 중국 정부 사이트인 중국망(中國網)은 “한국 여자 양궁팀과 결승전을 벌인 중국팀은 크게 배워야 한다”며 논어(論語; 三人行必有我師)까지 인용했고, NYT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중국 관중들이 떠들어도 6연패를 달성했다”고 보도했으며, 홍콩 문회보(文匯報)도 “한국 양궁 선수들은 뱀을 이용해 담력 훈련을 했을 정도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고 전했답니다. “10점 과녁만 남기고 쏘는 훈련”, “선수심리․탄착군 변화 PDA에 담아 과학적 관리”, “큰 대회서 떨지 않게 옷에 뱀 넣는 담력 훈련 유명” 등, 모든 기사가 이들의 승리는 ‘우연(偶然)’이 아니고 그 근거가 분명함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단체전 우승을 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개인전에서 금․은․동(金銀銅) 메달을 모조리 차지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장쥐안쥐안(張娟娟) 단 한 명에게’였습니다. 8강에서 주현정이 그녀에게 무너질 때는 ‘이제 금․은 메달 2개가 우리 차지겠구나.’ 했고, 4강에서 윤옥희가 그녀에게 무너질 때는 ‘이제 금․동 메달이 우리 차지겠구나.’한 것이 끝내 박성현까지 무너져 은․동 메달이 우리 차지가 된 것입니다.

 

장쥐안쥐안은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박성현이 마지막 화살로 10점을 쏘아 중국을 1점 차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우리를 추격해온 선수랍니다. 그녀는 그때 “한국 선수와 만날 때면 흥분돼 가슴이 뛴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비록 지더라도 내 실력이 그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이번에 금메달을 받고는 “이날을 위해 한 발씩 전진하며 힘든 전쟁을 치러왔다. 심리적으로 나는 박성현과 싸울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하더랍니다. 산뚱성 칭다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1m 64cm로 처음에는 육상을 하다가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사격을 거쳐 양궁을 하게 되었고, 숫기가 없고 조용한 성격을 지녔으며 “내가 양궁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양궁이 나를 선택했다.”고 말했답니다.

 

장쥐안쥐안이 승리를 한데 대해 우리 궁수들을 극찬하던 중국의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신문의 제목은 “질 수도 있지”, “7연패 부담 너무 컸나… 흔들린 神弓들” 등이었고, “비․바람․중국 관중 ‘소음 응원’… 홈 텃세에 눈물”, “스포츠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다시 한 번 일깨워”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중국측의 고약한 응원을 꼬집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단체전 승리 이후의 기사와 그 방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일부러 소음 속에서 연습한 이야기나 옷에 뱀을 집어넣어 담력을 기른 이야기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흔듭니다. 인공으로 강우를 조절한다는 그 중국 땅의 비바람도 생각하고, 중국 관중의 치사한 응원도 생각하고, 선수들의 마음가짐이나 음식, 휴식, 감독과 코치의 지도 등 저로서는 주제넘은 것까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심지어 12개의 화살을 네 번에 나누어 쏘는 방법까지도 생각해보면서 ‘그건 어쩔 수 없겠구나. 한 번에 세 발씩 네 번으로 나누어 쏠 동안 마음과 몸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니 원망할 수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는 나라라면 저들이 우리를 티베트처럼 대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해보았고, 돈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이 하도 으스대니까 “언젠가 돈을 벌면 한국인들을 짓밟아보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라는 얘기도 생각났습니다. 짓밟아보겠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게 짓밟히는 세월을 얼마나 오래 견디며 살아온 민족입니까? 저는 저들이 무섭습니다. 저들 중에는 장쥐안처럼 장차 우리를 누르고자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중국은 큰 나라이고 성장 잠재력이 무한대인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큰 영토를 가졌으면서도 변방의 작은 나라들을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동북공정(東北工程 :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은 가령 한강 이북의 땅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라는 것 등을 주장하기 위해, 말하자면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수많은 학자들을 모아 그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연구를 시킨 사업입니다.

 

지난 초여름이었습니까? 2008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우리의 서울을 지나간 때가. 시내의 예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잠실역에서 내려 출구를 나오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너나 먹어라!” 붉은 글씨의 피켓을 든 젊은 여성이 보였고, 더 걸어 나오자 이번에는 오성홍기(五星紅旗)를 든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삼엄한 얼굴로 거리를 휩쓸듯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복을 입지 않았을 뿐이지 그 걸음걸이가 제 나라에서처럼 당당했습니다.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쪽이 끝내는 이긴다더라.”는 말도 떠올리고 우리 젊은이들의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싶었습니다.

 

세 궁사에게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그 메달을 되찾아오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스포츠는 좋은 말로 ‘경쟁’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유도 90kg급에 출전한 그루지아의 이라클리 시레키제는 준결승전(戰)에서 러시아 선수를 한판으로 꺾은 뒤 말없이 그루지아 국기를 가리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루지아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날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나라입니다.

 

세 궁사에게,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놓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야 이런저런 잡념 없이 쏘아야 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한 경쟁이었습니다. 그 경쟁이, 제 터무니없는 욕심이었는지 모르지만, 너무 억울하게 끝나고 만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 똑똑한데 모이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자조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 속의, 말 위에서 힘차게 시위를 당기는 그 용사의 모습이 기억납니다.『三國史記』「고구려본기 제1 : 시조 동명성왕편」은 왕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골격과 생김이 영특하여 7세에 남과 다르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이 되었다 한다. 금와에게 아들 7형제가 있어 항상 주몽과 더불어 유희하는데 그 기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홍신문화사, 1995, 274~275쪽).

 

『龍飛御天歌』를 보면 태조 이성계도 활을 잘 쏘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한군데만 옮깁니다. “고려 공민왕은 태조를 동북면원수로 삼아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원(北元)을 끊도록 했다. …(중략)….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는 산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우리 군대가 포위를 했다. 이때 태조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따르던 자의 활을 가지고 편전(片箭)을 써서 쏘았는데 70여 발이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했다. 성중에서 기운이 꺾이니 고안위는 처자식을 버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밤에 도망쳤다. 다음날 그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여러 산성이 그 위세를 보고 모두 항복하니, 1만여 호(戶)를 얻었다(솔출판사,1997,387~388쪽). 우리 민족은 예부터 활을 잘 쏘았으니 이런 얘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