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메일 박스에는 ‘학리(鶴里)’ 선생께서 더러 오고 있습니다. 그분 메일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Moonlight'이라는 제목으로 아름다운 달 사진들과 함께「월광 소나타」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만 보려면 Esc 키를 누르면 된다’는 멘트 아래 적힌 사연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행복하세요.” 뿐이었습니다. 늘 그런 식입니다. 문교부 고위직을 지낸 분입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어느 실버타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서운(瑞雲)’이라는 분도 자주 옵니다. 다양한 내용을 스크랩해서 보냅니다. 예를 들면, ‘중국 국보전’, ‘150억 원짜리 수석’, ‘2008년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반드시 투표합시다’ 같은 것들입니다. 어제는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옛 유행가가 첨부됩니다. 자료를 아주 열성적으로 모아 보내기 때문에 보고는 바로바로 지웁니다. 벌써 은퇴했는데, 아주 원만하고 생활도 단정하며 그 모습이 점점 더 깔끔해지고 있습니다.
H 선생은 1970년대 중반까지 문교부에서 고등학교 전문계열 편수관을 지낸 분입니다. 그분은 ‘한국 역대 대통령 학위’, ‘노부부의 건강’, ‘독도가 한국 땅인 증거들’, ‘세계 자연유산 제주도 동굴’ 같은 자료를 많이 보냅니다. 어떤 자료들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혹 좀 야한 사진도 보냅니다. 어떤 날은 대여섯 통을 보내므로 그냥 두면 제 이메일 창고가 가득차고 말 것입니다.
이 세 분에게는 1년에 그저 두어 번만 안부를 전합니다. 그래도 아무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불평을 하지 않는 이메일 중에는 ‘교보문고’, ‘KB카드’, ‘싸이버스카이’, ‘국세청’……에서 보내는 메일도 있습니다. 이런 메일 말고는 대부분 읽어보고 답장을 하거나 어떤 작업, 판단을 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불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 살아가자고 하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메일도 아니고, ‘학리(鶴里)’ 선생이나 ‘서운(瑞雲)’ 선생, H 선생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자료를 보내면서 답장이나 댓글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다른 H 선생은 미니홈피를 운영하면서 그 홈피에 올리는 글을 메일로 받아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메일을 보냅니다. 가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이 옵니다(○○, ○○○부분은 필자가 숨긴 부분임).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 받기만 하는 사랑처럼 일방적인 사랑은 힘을 빼고 의욕을 잃게 합니다. 근래 독자님들의 답글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 달간을 계속 간단한 답글 한 번 보내지 않는 독자님은 ‘○○’를 스팸메일로 취급하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 구독료는 답글입니다. 단 한 줄이라도 독자님의 생각이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답글이 바로 구독료입니다. 저도 그런 수입이라도 있어야 의욕이 꺾이지 않지요. ○○○명의 독자님 중에는 놀랍게도 매일 답글을 보내주시는 고마운 70대의 ○○○ 독자님도 계십니다. ○○○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저의 편지를 그저 수동적으로 受信(수신)만 하시는 수신형 독자님도 많이 계십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근황 등을 가끔이라도 發信(발신)하는데 너무 인색하신 독자님들의 '침묵'이 여전히 무겁게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중략) 어떤 독자님은 저를 만났을 때 "답글 보내라고 촉구하지 말라." 또는 "메일 보내기 싫으면 보내지 말라. 내가 당신 블로그에 들어가서 보겠다." 이런 말을 저에게 거침없이 던지는 독자님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독자님의 마음과 교양을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매너는 비단 저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서 기초,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입니다.”
이분의 이런 생각에, 저는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댓글을 보면 누가 반갑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단 한 명에게라도 댓글을 달아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이건 말하기가 좀 쑥스럽지만 저의 경우 제 가족들 중에는 제가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가족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요구는 가족에게도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반가운 댓글을 많이 받아본 저로서는 그 댓글이 사실은 ‘돈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도 들지 않는 댓글 달기를 왜 하지 않느냐고 대어들다시피 하는 것은 “돈 좀 내라.”는 것보다 더한 요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H 선생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번 그런 내용의 메일을 보낼까 하다가 그분의 생각이 워낙 강해서 공연히 미움만 받겠다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분의 메일을 받고 있느냐 하면, 그분은 옛날에 교육부 고위직을 지낸 분으로 아는 것도 저 같은 사람은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참 많고 인격도 높아서 그분의 그 한 가지 단점에 비해 장점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분의 메일을 받아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콩 음식’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냈는데, 콩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희한한 나라의 희한한 식당에서 벌거벗은 여성 종업원을 뻔뻔하게 쳐다보는 손님들을 찍은 사진들을 곁들여 실었습니다. 아마 H 선생의 부인께서 출장 나간 사이에 실었거나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사진이 실렸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1년에 네댓 번씩은 댓글을 보냅니다. 그분에게 댓글을 보낼 때는 ‘답장’ 형식으로 하지 않고 새로 그분의 아이디를 클릭해서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답장’을 클릭하여 보내면 메일 용량이 커진다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자신의 단점은 감추고, 수탉처럼 그 벼슬을 세우는 데만 열심인 사람과 달리-그분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개성이 참 강한 분입니다.
제 후배 교장 중에도 미니홈피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예의 두 번째 H 선생과 비슷한 요청을 하면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그분의 카페에 들어가서 찾은 다음과 같은 사연을 한번 보십시오. 문장이 거칠지만 그의 글이므로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메일을 받아 보시는 분을 상대로 카페에 가입 좀 해달라고 SOS를 치고, 여러 번 안내를 하고, 당부를 해도 꿈적도 하지 않은 분들이 많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선천적으로 남을 도와주기를 싫어하고, 인색한 분들임이 있음을 카페를 열어 카페지기를 하면서 절실하게 와 닿는 대목이다. 물론 개인 나름대로의 이유와 사정이 있는 것도 안다.”
“내가 잘 아는 분은 자기가 아쉬우면 남에게 부탁을 잘 하면서 다른 사람이 부탁을 하면 무엇인가 빼앗기는 것과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중략) 반면에 무척 친절하고 적극적인 사람도 많다. 이런 분들은 생활이 밝고 긍정적인 점이 공통점이다. (중략) 사람이란 것이 신비하게 상대방을 잘 파악하고 산다. 실제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그 어려움을 감수하고 도움을 주어왔을 때 감동을 하고 신뢰를 하게 된다. 돈도 안 들고 힘도 안 드는데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 사람을 신뢰하고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해오면 도와주겠는가….”
돈도 들지 않고 힘도 들지 않는다니요. 굳이 그분의 카페에 회원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 댓글을 달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차라리 “카페 운영에 필요하니 성금 좀 내라”고 하면 “그래, 알았다.”며 당장 돈을 낼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이메일, 블로그, 미니홈피 홍수시대(洪水時代)여서 우리는 참 성가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어쩐지 궁금하기도 하니 안 열어볼 수도 없는 것이 그것들 아닙니까.
다행히 저는 댓글 좀 달아달라는 말은 생각도 하지 않거니와 상대방이 무얼 묻지 않으면 제 블로그 구경 좀 오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일전에는 조선일보(2008.7.23.부록 조선경제 1면)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며 ‘나도 쓰레기를 생산하면서 남을 성가시게 하는 한심한 사람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렇다는 판단이면 문을 닫겠습니다. 그 기사를 보여드립니다. 이미 보셨습니까?
[모닝커피] '이메일 막는 회의'까지 하는 세상
글로벌 기업들이 이메일·메신저 사용량 폭증에 따른 직원들의 업무 효율 저하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이메일·메신저 같은 디지털 관련 정보의 과부하(overload) 현상 해결이 최우선 경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시넷 등 IT전문 외신에 따르면 MS, 인텔, 구글, IBM, 스탠퍼드대 같은 주요 미국 IT기업 및 대학 연구원들은 '정보 과부하 연구 그룹(Information Overload Research Group· IORG)'을 결성하고 최근 미국 뉴욕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이 모임은 기업들이 이메일과 메신저 등 과도한 디지털 정보의 부작용에 대처하기 위한 본격적인 첫 회동이다. 즉 회사원들이 쏟아지는 이메일과 메신저 쪽지에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느라, 정작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대책을 세우겠다는 것.
네이선 젤데스(Zeldes) IORG 의장은 시넷을 통해 "기업들의 도움을 받아 개인과 기업에 유용한 연구결과를 도출해 내겠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연구기관 바섹스(Basex)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기업 업무시간의 28%는 이메일·메신저에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데 쓰이며, 이로 인한 미국 경제의 연간 손실액만 6500억 달러에 달한다.(인터넷 신문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신문에는 삭제된 문단 : 옮긴이 註)
국내외 기업들은 다양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인텔이 최근 도입한 '조용한 시간(quiet time)' 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직원 300명이 매주 화요일 아침 4시간 동안 이메일·메신저 접속을 않는 실험적인 제도다.
LG전자는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필터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고, 제목·본문·보내는 사람의 신뢰성 여부에 따라 필터 시스템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있다. 또 오버추어코리아나 토피아에듀케이션 등 온라인 업계에서는 메일은 담당자에게만 보내고, 하루 2회만 이메일을 확인하는 '이메일 에티켓 운동'을 전사(全社)적으로 실시 중이다. 백승재 기자 whitesj@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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