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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고백(Ⅰ) : 문학가들의 거짓말(?)

by 답설재 2008. 5. 30.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는 바람을 풀어 줍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가득 하도록 명해 주시옵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시어,  무르익는 것을 재촉하시고  무거워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살 것이며,  깨어 앉아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구를 때면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릴케 「가을날」

 

      

가을만 되면 "릴케, 릴케,……" 해서(가을이 오면 신문에도 이 시가 실려 우중충한 지면을 가을빛으로 물들이기도 해서) 아예 릴케 시집을 샀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걸핏하면 "이순신, 세종대왕, ……" 하면서도 정작 그런 인물들의 전기나 가령 『난중일기』(국보76호, 원본은 초서체 일기)처럼 그 인물들의 빛나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사람은 드물다고 여기는 나는, 교과서에 나온 작품이 실린 책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그 책을 사보았습니다. 드물게 '아, 교과서에 실린 작품 말고도 좋은 작품이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실망스러울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뭐 이런가' 싶어서 릴케 시집은 여러 번 샀습니다. 도대체 감동을 느낄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신부(新婦)

 

나를 불러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큰소리로 불러주세요!  당신의 새악시를 이토록 오래 창가에 세워두지 마십시오.  플라타너스 古木의 가로수 속에  저녁의 監視는 저물었습니다.  아무도 없이 텅 비었답니다. 밤의 집에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당신의 목소리로 가두지 않는다면  난 손바닥에서 뛰쳐나와  暗靑色의 정원으로  내 몸을 부어버리겠어요……. 

 

                               

R. M. 릴케, ○○○역주,『검은 고양이』(민음사,1973)에 실린 첫 번째 시(일부 단어는 새 문법 체계에 맞추어 수정함), 어떻습니까? '대시인의 시가 다르구나' 싶도록 감동적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리나라 삼류 시인의 시에서 이보다는 더 큰 감동을 받는 편입니다.

 

 

님은 나를 영원케 하셨으니, 그것이 님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님은 수없이 비우시곤 또 항시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이 작은 갈피리를 님은 언덕과 골짜기 너머로 나르셨습니다. 그리고 님은 그것을 통해 항시 새로운 선율을 불어내셨습니다.  님의 불멸의 손길에 닿아 내 어린 심장은 기쁨에 녹아들어 형언키 어려운 말을 외칩니다.  님의 무한한 선물을 나는 이 작은 두 손으로 받을밖에 없습니다. 세월은 가도, 여전히 부으시니, 채울 자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님이 내게 노래하라 하실 때엔 나의 가슴은 자랑으로 터질 것 같사오며, 님의 얼굴을 우러러 뵈올 때엔 저절로 눈물이 두 눈에 솟습니다.  내 생활 속의 온갖 거칠고 거슬리는 것들은 한 감미한 조화에로 녹아들어---나의 동경은 바다를 지나 나는 새처럼 날개를 폅니다.  나는 님이 나의 노래를 즐기심을 압니다. 나는 오직 가수로서만 님이 계신 앞에 나타남을 압니다.  나의 노래의 멀리 펼쳐진 날개 끝으로 나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님의 발에 닿습니다.  노래하는 기쁨에 취해 나는 나 자신을 잊고 주이신 님을 벗이라 부릅니다.

 

 

앙드레 지드가 "나는 어떠한 문학에 있어서도 이처럼 엄숙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가락이 인정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고 한 시인 R. 타고르의 서정시 『신께 바치는 노래-기탄잘리』(○○○옮김, 홍성사,1996) 103편 중 제1편입니다. 워낙 유명한 시인이므로 우리 같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도 극찬해온 만큼의 감동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민망해서 지금까지는 자신의 허접스러운 수준과 부족함을 숨기고 살아왔습니다.

 

또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밀턴은 《그리스도의 강탄에 부치는 찬가》에서 …(중략)… 장엄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운 시구로 구세주의 강림에 당혹스러워하는 이교의 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평가된 시입니다(Thomas Bulfinch, ○○○ 옮김, 『그리스·로마 신화』(홍신문화사, 1997, 408).

 

 

신탁은 침묵했다.

목소리도, 듣기 싫은 신음소리도  더 이상 활 같은 지붕에 거짓말이 되어 울리지 않는다. 아폴론은 이제 그 신전에서 예언을 줄 수 없고,  다만 공허한 소리를 외치며 델포이의 언덕을 떠나간다.  밤의 수면도 들이마신 주문도  신탁의 굴에서 나오는 창백한 눈의 사제를 고무하는 일은 없다.

 

      

어떤 점이 그처럼 장엄합니까? 또 어떤 점을 그처럼 품위 있다고 하고, 어떤 점이 그토록 아름답습니까?

 

나는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작품들을 보고 정말로 감동을 받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면 혹 우리가 그 위대한 작품들을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인용한 작품들을 애써 번역한 분들께는 큰 결례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문학작품, 특히 시(詩)를 이해하려면 그 작품을 이룬 언어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해야 한다. 번역자이든, 문학가이든, 시인이든, 그 언어와 그 문화와 그 정서와 생활상 등 모든 것을 그야말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작품을 들어 위대하다느니 어떠니 하면 거짓이다. 젠체(잘난 체)하는 경우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해외문학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너무 혹독한 결론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합니다. 가을이면 꼭 릴케의 「가을날」을 대하게 되듯 다른 시들도 그렇게 자꾸 읽다보면 ‘아, 장엄하고 품위 있고 아름답구나.’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결론은 스스로 참 궁색하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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