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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C.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by 답설재 2009. 1. 8.

C.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

 

 

 

 

 

 

 

지난해 11월 말, 프랑스의 재미있는 대통령 사르코지가 100세 생일을 맞이한 한 노인의 집을 찾았답니다. "온 국민을 대신해 경의를 표하러 왔습니다."


  그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 인물이든 아니든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 노인이 C.레비-스트로스라는 학자입니다. 그의 생일을 맞아 프랑스 정부에서는 기념 전시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했고, 방송은 열두 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학술기관 아카데미프랑세즈는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니 온 나라가 들썩거렸을 것입니다. 그는 1981년(73세)에 한국학중앙연구원(前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1927년(19세),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최연소자로 합격한 그는, 1935년(27세)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 사회학 교수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아내와 함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아마존 열대우림지역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과 함께 몇 달 혹은 1년여씩 생활했으며, 그 결과로써 1950년(42세)에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를 출간했습니다.

 

『슬픈 열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제목입니다. 『슬픈 열대』. 1998년 '한길사'에서 번역된 이 책은 제목도 제목이지만 원주민의 작품인 듯한 붉은색 문양의 표지 디자인도 멋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제1판 제1쇄의 가격이 25,000원이었을 만큼 762쪽이나 되어 저처럼 멋으로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그리 만만한 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슬픈 열대』, 뭐가 슬픈가 싶었습니다.

 

 " 『슬픈 열대』의 주제는 여러 각도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어, 문명의 고발과 함께 신세계의 붕괴, 이국적인 것에 대한 환멸, 그 자체를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경험의 무능력, 그리고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상태'에 대한 탐구 등의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비관주의적 어조로 지적 초탈과 정신적 평정을 강조할 뿐이다. 그에게 악의 기원이란 육체나 욕망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문명의 역사로서, 신비스러운 조화의 구조를 지녔던 원시적 과거가 이제 우리 눈앞에서 파괴되어 소멸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열대 원주민 사회는 슬픈 것이다.”(90~91쪽)

 

  이 책을 소개한 글들을 보면(1998년 어느 신문의 「문명에 우열은 없다」, 다른 한 신문의 「문명과 야만 이분법으로 비판한 20세기 명저」, 2008. 12. 2, 조선일보 「만물상」), 레비-스트로스는 나무뿌리나 거미를 먹으며 벌거벗은 채 생활하는 원주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회를 파괴하는 서구문명에 분노하고 '야만'과 '문명'에 대한 기존 관념에 의문을 던졌으며, 인간의 제도와 현상 속에 숨겨진 '구조'를 찾아내려고 한 탐구정신으로 '구조주의 인류학'을 탄생시켜 이후의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원주민의 주술적(呪術的)이거나 신화적(神話的)인 사고도 유럽인의 과학적(科學的) 사고 못지않은 합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문명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눈물겹게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정말 미신이라고 불려야 할 것인가? 그러한 편애 속에서 나는 오히려 미개민족들이 무의식중에 행하였던 어떤 지혜의 흔적을 보며, 거기에 역행하려는 현대의 반항에는 정말 광기조차 서려 있음을 본다. 우리들이 숱한 좌절과 안타까움을 대가로 하여 쟁취하는 정신적인 조화를 그들 미개민족들은 흔히 쉽게 얻을 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경험의 진정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한계와 리듬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 힘 밖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편이 낫다. 음향과 향기가 색채를 지니며, 감정에는 무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은 그 고유의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266쪽)


  그 모든 것이 하도 잡동사니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남비콰라족의 생활용품을 수집하는 사람은, 인간 활동의 결과라기보다는 확대경을 통해서 본 거대한 개미족의 활동의 산물 같은 것이 널린 것을 보고는 실망을 하게 된다. 실제로 남비콰라족이 높다랗게 자란 풀을 헤치며 일렬로 걸어가는 모습은 개미들의 종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자들이 각기 성글게 짠 채롱을 하나씩 메고 숲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개미들이 때때로 자기들의 알을 옮기는 모습 같기도 한 때문이다.(507~508쪽)

 

완전히 벌거벗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이른바 '수치'라고 부르는 감정을 모른다. 그들은 그 경계를 다른 곳으로 옮겨다놓은 사람들이다. 멜라네시아의 몇몇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인디언들에게서 수치라는 것은 육체의 노출이 크냐 작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평정한가 아니면 흥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따른 것이다.(523쪽)

 

(불교 유적에 대한 생각) 참배의 형식과 자신 사이를 방해하는 오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우상에 절을 한다거나 사물의 어떤 가상적인 초자연적 질서를 숭배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상가에 의해서 또는 그의 전설을 창조하였던 하나의 사회에 의해서 2,500년 전에 형성되었던 결정적인 명상들에 대해 다만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문명은 이 같은 명상들을 확신함으로써만이 그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경청하였던 대가들로부터, 그 사상을 읽어보았던 철학자들로부터, 조사해보았던 사회들로부터, 그리고 서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자들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워왔던가?(738쪽)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훌륭한 소개자이자 비판자인 영국의 인류학자 리치는 그를 가리켜 '철학자이자 시인'이라고 했답니다. 『슬픈 열대』에는 직접적으로 그의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그 기억이 글자 그대로 나타나는 한은 그렇지 못하다. 회상을 해보는 것은 좋아하더라도, 그 고된 일들과 괴로움을 다시 겪어보고자 하는 이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생 그 자체이기는 하나,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다. 그러기에 짧은 환각 속에서, 사람들이 불투명한 힘인 안개와 번개-하루 종일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그 모호한 갈등을 파악하였던-가 드러남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태양이 천국에 사는 어느 수전노의 작은 동전처럼, 고요한 물의 반짝이는 표면을 향해 내려올 때나, 또는 그 태양의 둥근 표면이 딱딱하고 톱날처럼 생긴 나뭇잎 같은 산봉우리의 윤곽을 두드러지게 할 때인 것이다.(179~180쪽)

 

  레비-스트로스는 또한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내가 프랑스를 떠난 지도 5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대학의 교수직을 버렸다. 그동안에 더 현명한 내 동기생들은 대학에서의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과거에 한번 그랬지만, 정치 쪽으로 관심을 기울인 친구들은 벌써 의원이 되어 있고, 곧 장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떠냐면 인간 폐물들을 쫓아다니느라고 지구의 외진 곳만 찾아다니고 있다.(675쪽)

 

  교수로서 혹은 정치인으로서 성공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만큼,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고는 결코 그렇게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값진 정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풍경은 그 야성으로부터 의의 깊은 가치를 박탈해가는 단조로움을 안겨주게 된다. 그 경치는 인간을 거부하며 인간에게 도전하지도 못하고, 인간의 시선 아래서 없어지게 된다. 한편 영원히 새로 태어날 것 같은 그 삼림 속에서 피카타(어설픈 도로)의 좁다란 길 폭, 전신주들의 비틀린 그림자, 전신주들을 이어주는 전선이 늘어져 생긴 거꾸로 된 아치형, 이 모든 것은 이브 탕기(Yves Tanguy, 1900~55 : 환상적 풍경화를 많이 그린 프랑스의 초현실주의파 화가-역자)의 그림들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고독 속을 표류해다니는 조화되지 않은 물체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들은 인간이 지나갔음과 또 그 인간의 노력의 허무함을 증언하면서, 거기 있음으로 해서 더욱 명료하게 인간이 뛰어넘으려고 애썼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도의 일시적인 성격과 그 시도에 제재를 가했던 좌절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쓸쓸한 황야에 증거가 될 만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498쪽)

 

  그는 유네스코 문화사절로 동파키스탄과 인도를 여행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은 불교 유적(미얀마 등)을 그의 일관된 이념으로 관찰하고 사유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좀 긴 인용이겠지만 그래도 욕심만큼 길게 인용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만일 영원한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것은 5천 년 전의 것이라고도, 또 어제 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피라미드에 속한다고도, 우리가 들어 살고 있는 집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표면이 야들야들한 핑크색의 돌에 새겨놓은 사람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 것만 같다. 다른 어떤 입상(立像)도 이보다 더 깊은 평안함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순결하게 음란스러운 여자들의 모습과 '연인인 어머니'와 '수녀인 딸'의 대립-둘 다 비불교적 인도의 ‘연인인 수녀’와 대립한다-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모성적 관능도 잘 그려져 있다. 성(性)의 갈등을 초월한 것같이 보이는 그 평온한 ‘여자다움’은 반은 기식자, 반은 수인(囚人) 신세인 절의 중들-삭발 때문에 여승과 구별이 안 되므로 이들은 말하자면 제3의 성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도 또한 그들 나름대로 보여주고 있다.

  설령 불교가 이슬람교처럼 갖가지 원시신앙의 탈선행위들을 억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태로의 복귀의 약속이 내포하고 있는 통합에 대한 보장을 해줌으로써이다. 이런 방책을 사용함으로써 불교는 에로티시즘을 광란과 오뇌로부터 해방한 후에 재차 포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슬람교는 남성 지향에 따라 발전했다. 여성을 감금함으로써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아버렸다. 남성은 여성의 세계를 하나의 유폐된 세계로 만들어버렸다. 이 방법으로 아마 이슬람도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만 이슬람은 몇 가지 배제-사회생활로부터의 여성의 배제, 정신적 공동체로부터의 비신도의 배제-를 담보로 해서 그것을 손에 넣었다. 이에 반해서 불교는 그 평온을 하나의 융합, 즉 여성과의 융합, 인류와의 융합으로서, 그리고 신격(神格)의 무성적(無性的)인 표상 속에서 포착하려 한다.   성현(붓다)과 예언자(마호메트)보다 더 현저한 대조는 상상하기 어렵다. 둘 다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 밖의 모든 점에서 그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전자는 순결하고 후자는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며 힘이 넘친다. 전자는 남녀 양성 겸유자이고 후자는 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자는 평화를 애호하고 후자는 호전적이다. 전자는 모범적인 인격자요 후자는 구세주이다. 또한 양자 사이에는 1,200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중략)…   인간은 사자(死者)로부터 받는 학대, 저승에서 받을 악독한 처우, 주술에서 오는 불안감 등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세 가지 커다란 종교적 시도를 하였다. 대략 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인간은 불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연이어 고안해내었다. 그런데 각 단계가 그 전의 것에 비해서 진보를 이룩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후략)(731~732쪽)

 

   험담(險談)이 될까 싶어 조심스럽습니다. 교육부에 근무하던 1990년대의 어느 회의장에서 '한길사' 김언호 사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은 '잔잔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김언호 사장이 지난해 모 일간지의 명사(名士) 코너에 소개되었는데, 자신이 펴낸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이 『슬픈 열대』를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레비-스트로스, 혹은 세계적 학자의 명저(名著)라는 걸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선 762쪽이나 되는 책이니까요. 당연히 그만한 애정을 쏟은, 애정을 느끼는 책이겠지요. 그러나 이 책의 군데군데에서 번역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다시 읽어도 뜻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부분을 그냥 넘기려니까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겠지요. 762쪽이나 되는 책이니까 그만큼 번역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겠지요.

 

  아야베 츠네오(綾部恒雄)는 『문화인류학의 명저(名著) 50』(김인호 옮김, 자작나무, 1999) 속에 레비-스트로스의 다른 책 『야생의 사고』와 『친족의 기본구조』는 넣으면서 이 책은 넣지 않았습니다. 한 학자의 책을 세 권이나 넣기는 싫었을까요? 아니면 그 50권 속에 일본 학자들의 책도 다섯 권이나 넣으려니까 벅찼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