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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에릭 시걸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by 답설재 2008. 11. 19.

에릭 시걸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황창수 옮김, 은하, 1990

 

 

 

 

 

 

그런 아이가 불우한 걸까? '불우한 환경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소설이 떠오른다. 어렵잖게 많이 보았다. 보면서, 그런 아이를 기억해두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기억해두는 것은 왠지 옳지 못한 일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설은 단순하다. 아내가 모르는 아이가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면 안 되지만 어쩌다가 자신도 모르게 태어난 그 아이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에서 몇 군데를 인용하면 이렇다.

 

"몽뺄리에에 논문을 제출하러 유럽에 간 일이 있었지……."

"그래서요……?" 침묵이 흘렀다. "그때 여자관계가 있었어." 그는 그것을 아주 빨리 말했다. 마치 통증을 줄이기 위해 반창고를 빨리 떼듯이. 실러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럴 리가."(43)

 

실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상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딸들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열심히 행동했다. 그녀는 맹렬히 일했다. 그리고 실제로 라인하르츠의 책 편집을 마쳤다. 물론 봅은 그녀의 이런 행동 뒤에 숨은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더욱 멀어지는 까닭에 그는 점점 가망이 없다고 느꼈다. 그들은 결코 이처럼 사이가 멀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미소가 그리울 때마다 그는 자신을 증오했다. 어떤 땐 그 소년이 미웠다.(59)

 

그의 시선은 아내가 이를 닦으러 욕실에 들어간 이후 줄곧 아내를 쫓았다. 몇 분이 지난 후 그녀는 잠옷을 걸치고 나왔다. 요즘 봅은 아내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좀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자명종 시계의 바늘을 맞추기 시작했다.(왜 그럴까? 방학인데.) 그는 다가가 아내를 포옹하고 싶었으나 그들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70)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걸 견뎌내겠다는 거야?" 실러는 고개를 움칫했다. "모르겠어. 때로는 견딜 수 없어. 어떤 때 밤에 우리가 앉아서 바하를 듣는 척하거나 책을 읽는 척하거나 모든 일이 언제나 똑같은 듯한 시늉을 할 때 나는 화가 치밀어서 그이를 죽이고 싶어져……." "당연하지." 마고는 비웃는 투로 말을 가로막았다. "…… 그리고 또 다른 때는 그 언제보다도 내가 그이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기도 해. 이상하잖니? 그런 짓을 했지만 정말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이밖에 없어."(125)

 

"송아지고기 찜 정말 맛있구나, 제시." "엄마,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봅이 말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줄곧 그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실러의 얼굴을 읽으려고 애썼지만 실러의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 없었다.(143)

 

"제가 프랑스의 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죠?" 소년이 물었다. 봅은 소년의 직감에 감탄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다. 쟝 끌로드. 내 생각에…… 그게 너에게 가장 좋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다시 말을 끊었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언제 떠나면 되죠?" 오, 맙소사. 이 녀석은 너무도 훌륭하군. 봅은 생각했다.(198)

 

"난 누구보다도 아빠를 증오해요." "제시카야?" 봅은 큰딸에게 호소하는 듯 다시 불렀다. "난 너를 사랑한단다 ……." "가서 죽어버려요."(199)

 

소년은 봅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쪽저쪽으로 의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난 베퀴스 교수요." 그는 소프라노 바리톤 목소리로 말했다. "통계학에 대해 물을 것이 있으십니까, 선생?" "예." 봅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놈의 비가 오늘 그칠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교수님?" "음." 쟝 끌로드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내일 다시 찾아오셔야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한 농담에 즐거워하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아버지의 가죽의자에 앉은 채로.(220)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가 이미 잠들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찾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 꼭 대고서 생각했다. 가지 마오, 실러.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271)

 

문이 닫혔다. 몇 분 후에 흰 점보기가 서서히 꼬리를 들더니 점점 짙어져가고 있는 어둠에 덮인 활주로 쪽으로 향했다. 봅은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이제는 텅 빈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사랑한다, 쟝 끌로드야. 부디 나를 잊지 말아다오.(297)

 

세상의 모든 가정은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아이는 모두 다르다.

'특별한 환경의 아이'를 가정해야 한다면, '교육'은 그 아이에게도 가장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은 모든 아이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막힌 사연'을 가진 아이라고 표현해야만 한다면, 그 아이는 '기막힌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일 뿐이다. 교사는 세상의 어떤 아이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아이들은 아름다우므로 우리의 관심이나 사랑을 받아야 할 철저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모든 아이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태어났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얼마나 건방진 교사인가.

 

소설은 서술적이거나 설명적이지 않다. 회화적, 음악적, 혹은 시적(詩的)인 대화로 이어진다. 에릭 시걸이 그렇게 썼다.

이런 말이 있다. 흔한 말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다른 문화를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관습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관습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관습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관습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면 더 관대해지게 된다."(앤서니 웨스턴, 이보경 옮김, 『논증의 기술』2008, 33).

 

결코 이 소설 혹은 봅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쟝 끌로드라는 아이를 옹호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에는, 다른 문화를 연구하는 이야기에 관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