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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홍우 『敎育의 槪念』

by 답설재 2008. 11. 15.

 이홍우, 『敎育의 槪念』

文音社, 1991, 2002

 

 

 

 

 

 

 

 

 

 

 

날개에 소개된 저자 약력은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敎育學科, 서울大學校 大學院 敎育學科, 미국 콜럼비아大學(EdD),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敎授’뿐이다. 책은 프로필처럼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180쪽이다.

앞날개에 소개된 이렇다. 이 책의 전부이다.

    

敎育의 槪念을 이해한다는 것은 ‘敎育의 定義’를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定義를, 그 밑바닥에 깔려서 그것을 받치고 있는 槪念體系와 관련지어 이해한다는 뜻이다. 종래의 敎育學硏究는 결국 敎育의 槪念에 ‘具體性’을 부여하기 위한 學問的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工學的 槪念’, ‘成年式 槪念’, 그리고 ‘社會化槪念’이라고 부른 세 가지 槪念은 敎育이라는 總體的 現象을 각각 상이한 ‘樣相’에서 파악하고 있다. 각각의 槪念은 특정한 問題意識과 槪念體系를 나타내고 있다. 敎育學 공부는 이들 槪念을 가능한 한 具體的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敎育이 하는 일은 世界를 배우도록 이끄는 일이다. ‘위대한 것’에 대한 憧憬과 讚歎,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苦痛과 絶望은 敎育받은 사람의 으뜸가는 徵表이다.

 

그는 이 결론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거나말거나 뒤표지에서 다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일 것이다.

 

自我의 크기, 自我의 위대성은 그것이 ‘생각을 품을 수 있는’ 世界의 크기와 위대성에 비례한다. 自我가 尺度로 삼는 世界, 自我에게 憧憬과 讚歎을 자아내며 때로는 스스로의 보잘 것 없음에 苦痛과 絶望을 안겨 주기도 하는 그 世界가 크고 위대한 것일 때 自我는 그만큼 크고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설명하고자 한 것은 序文에 개괄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서문만 읽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전체적인 내용의 개요를 제1장(문제의 성격)에서 정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제2장(工學的 槪念 : 鄭範謨), 제3장(成年式 槪念 : 피터즈), 제4장(社會化 槪念 : 뒤르껭)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5장(시작하는 結論)에서 전체적인 윤곽과 성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교육에 대한 저자의 견해이다.

 

문장은 멋스럽다. 제5장의 이름이 ‘시작하는 結論’으로 된 것만 해도 그렇다. 그 결론은 <1. 장님과 코끼리 2. ‘세계’를 배우는 것 3. 존 듀이의 敎育理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미있다. “뭐가 재미있나?” 묻는다면,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때로는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혹 "뭐가 재미있나?"고 따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교사들로부터는 소설만큼 재미있는 책이 맞다는 평가를 받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을 때처첨 흐름을 놓치면 그 다음을 읽기가 어려워진다.

두껍지 않은 것도 좋고, 문장 또한 유려하다. 서문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구태여 말하자면, 오늘날의 社會에서는 著者가 이 책에서 말한 ‘위대한 것에 대한 憧憬과 讚歎’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敎育(또는, 敎育의 失敗)의 結果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敎育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는 식의 思考, 大衆의 利害나 選好가 學問과 文化의 標準이 될 수 있다는 식의 思考, ‘本質的으로 위대한’ 文學, 音樂, 美術은 있을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滿足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바로 ‘價値’라는 식의 思考가 만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敎育이 必要하지도 可能하지도 않다. 著者가 보기에, 존 듀이의 ‘敎育理論’은 이런 종류의 破局을 胎芽的인 형태로 豫告하고 있다. 다만, 듀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막아야 할 破局이 아니라 指向해야 할 理想이다.

 

서문 끝 헌사(獻辭)는 더욱 그렇다. 학자로서 이보다 더 영광스런 헌사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싶지 않았다.

 

책을 한 권 쓰고 난 뒤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책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著者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의 경우에, 단 한 분 鄭範謨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著者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이 책은 著者가 선생님의 슬하를 떠나 꽤 오랫동안 孤兒처럼 여기저기 乞食을 하다시피 한 톨 두 톨 섭취한 知的 滋養의 일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다른 無禮가 그러했듯이, 이 책 여기저기에 선생님의 啣字를 적어 넣은 無禮 또한 용서받을 수 있다면, 著者는 감히 이 책을, 한때 저자에게 이 세상 모든 기쁨의 근원이었던 鄭範謨 선생님께 바친다.

 

제5장은, 참으로 그럴 듯하다. 우선 저자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오는 우화 '코끼리를 지각하는 장님들'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다만, 그 장님들을 비극적, 혹은 희극적으로 보는 일반론과 달리 세 장님은 각각 그 자아(自我) 속에 본질적으로 세계(그리하여 세계관)를 담아 표현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그렇게까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논리에 의하면 '敎育은 人間行動의 計劃的 變化(工學的 槪念)'라고 한 鄭範謨나, '人類의 知的 遺産으로서의 敎科를 가르치는 일'(成年式 槪念)이라고 한 피터즈, '制度에 들어 있는 精神的 要素를 內面化하도록 하는 일'(社會化 槪念)이라고 한 뒤르껭은 교육에 관한 한 대표적 현자(賢者)가 될 것이다.

 

한편, 코끼리는 무한한 크기의, 그야말로 무한한 탐구대상으로서의 세계, 어느 정도의 세계인가 하면, 그 무한함에 대해 인간인 우리는 동경과 찬탄을 넘어 절망감(絶望感)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육(敎育)과 교사(敎師)에 관한, 교육과 교사를 위한 무한한 찬탄과 애정, 심지어 지식주입식 교육을 일삼는다고 비판 받는 교사들에게까지 그러한 찬사을 보내고 있다.

 

단, 제5장에 관하여, 저자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이홍우 교수가 이 글을 볼 일도 없긴 하지만), 마지막 절(節)에서 설명한 <존 듀이의 교육이론>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설명되어야 하는지' '간략한 언급이 분명하다면 굳이 그 비판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는지' 등으로써 그 비판에 공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그야말로 '간략한' 그 비판의 하나하나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지만, 가령 "듀이가 말한 '계속적인 成長'은 최종의 固定된 目標를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비판적 지적은, 듀이 자신도 극단적인 느낌을 주는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교육이란 '최종의 고정된 목표를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철저히 신뢰하는 우리 교육자들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지식주입식(획일적, 강제적)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 교육의 현상이 바로 우리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듀이의 지적에 대해서는, 40년 우리나라 현장교육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식주입식 교육의 한심한 현실(과학과의 실험관찰까지도 지식주입식으로 설명해야 직성이 풀리는)에 스스로 몸서리를 치면서 "오죽하면 그렇게 주장했겠는가!"라는 응원까지 보내고 싶기도 하다.

 

저자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교육학 입문단계에서 주로 취급되어 왔으나 그 완성단계에서 더 적절하게, 풍부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듯이, 이땅에 태어난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교육학 입문단계에서 읽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그때는 이 책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40여 년 뚜렷한 일 하나 기록하지 못한 채 이 길의 마감을 눈앞에 둔 날 드디어 읽고 싶어진 까닭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돌아봐도 아득하고 앞을 봐도 아득하다. 내가 보는 '교육'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