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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쇼스타코비치,「왈츠」Chostakovitch, Valse No.2

by 답설재 2008. 8. 4.

 

 

 

Ⅰ 

 

 

돌아가야 할 시간, 무료하겠지만 이제 그만 만나야 하는데…… “춤 한번만…….” 하던 그(그녀)가 생각날 것 같지 않습니까?

혹은 이미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그녀)가 돌연 별로 충분하지 않은 인격의 어떤 남성(여성)과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시간의 주체할 수 없었던 당혹감, 질투심 같은 것이 떠오를 것 같지 않습니까?

 

혼자 자동차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담배도 피우고 한숨도 쉬고 어려운 일 귀찮은 일 잠시 즐거웠거나 기뻤던 일 두고두고 쑥스럽거나 부끄러웠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들리는 대로 뉴스나 토크쇼 음악도 듣습니다.

신문에서 제목이라도 봤던 일들을 언제나 자세히 별일 아닌 것들까지 합쳐서 꼭 “큰일 났다!”는 투로 전해주는 뉴스를 들으면 우스워지고 들을 때는 재미있는데 듣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토크쇼는 그걸 들은 자신이 우스워지고 음악은 우스워지지는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그 30분 혹은 한 시간 남짓에 무슨 거창한 교향곡을 듣거나 오페라를 듣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것입니다.

 

 

 

 

  Chostakovitch, 「Valse No.2」는 그런 단편소설입니다. 그 시간에는 꼭 희한하게도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 살아온 것이 지긋지긋해서,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다음에는 그 시골집을 부수고 말았는데도 자꾸 그 집, 겨울날 해거름의 사랑방 창호에 비치던 석양의 아름다움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내가…… 드디어 여기까지 와 있구나……’ 합니다. 살아갈 길이 참 암담하더니 어언 살아온 길이 결국 이렇게 누추하고, 정리를 해본다 해도 암담하던 그 기억에서 벗어날 만한 것은 남지 않았습니다.

 

 

 

 

Chostakovitch, 「Valse No.2」, 서로를 감싸고 서로에게 안겨 꿈결처럼 돌아가는 남녀를 그린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의 「왈츠」, 그 선정적인 모습도 떠오릅니다. 카미유 클로델의 그 「왈츠」는 혼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이처럼 왈츠를 추는 장면을 멋지게 묘사한 소설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나는 어느 작품을 보아도 까미유 끌로델의 그 ‘왈츠’ 만큼 아름답고 선정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싶다. ‘왈츠’를 보는 순간, 위의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은 바로 그 이유로 우리 사회의 남녀간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해 혹은 춤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그 작품 ‘왈츠’만으로 보면 ‘춤’이라는 것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또한 장담하고 싶다.”

 

     (졸저, 『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아침나라, 2005, 28쪽).

 

 

1,552쪽 짜리 명반(名盤) 해설에는 이 곡에 관한 정보가 없고,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현암사, 1997).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1906~1975)가 18세 때인 1925년에 졸업 작품으로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은 소련 국내는 물론 온 유럽의 악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또 1927년에 제1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제2위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음악원을 졸업한 뒤, 당시 소련 음악 및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혁신적인 풍조에 적극 찬동하여 오페라, 극음악, 발레음악, 영화음악 등의 분야에서 야심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약 10년 동안에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오페라 『코』, 발레음악 『황금시대』,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발레음악 『밝은 시냇물』 등의 화제작을 내놓았다.

그러나 1936년(30세)에 쇼스타코비치는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전위적인 그의 여러 작품이 “서구 냄새를 풍기는 형식주의적인 작품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부르주아적이며 인민의 적이라고까지 매도되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중략)… 1년 동안의 침묵 후에 발표한 교향곡 제5번이 소위 당국이 요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작품이었다. 과연 그들이 요구하는 “간결하고 명확하며 진실할 것, 형식상 고전적이며 민족적이며 내용은 사회주의적일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주장을 다 수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청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후략)….”(873~874쪽).

 

“15개의 교향곡으로 잘 알려진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리얼리즘이라는 구 소련의 독특한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비교적 큰 스케일과 격렬함이 담긴 교향곡과 현악4중주들로 유명하지만, 재즈 모음곡이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같이 작곡가의 유머러스한 일면을 담은 아기자기한 작품들도 남기고 있다. 재즈 모음곡 No.2 중 ‘왈츠’는 1938년에 작곡되었다. 비록 재즈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거쉬인의 작품들과는 달리 정통 클래식에 보다 가까운 작곡기법을 보여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화려함보다는 라벨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노스탤지어가 깃든 선율을 전형적인 왈츠의 흥겨운 리듬에 담고 있다.”(음반 해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 퇴근길은 당연히 통속적입니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서 나름대로는 이것도 삶이라고 이것저것 다 참고 포기하고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그 위안이 다시 삶을 이어주는 기대가 되기도 하고 다시 기운도 내고 때로는 눈물을 대신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977년에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Ballade Pour Adeline'』 연주로 데뷔한 프랑스 피아니스트 리차드 클레이더만(Richard Clayderman)의 쇼스타코비치 ‘왈츠’ 연주는 그 선정성을 아주 드러내놓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