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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수학자 누Nu 16」

by 답설재 2016. 11. 20.

수학자 누Nu 16

 

 

함기석

 

 

제7인공수면실 Time Captives 나는 16940시간째 동면상태다 내 우측 수면캡슐엔 힌두우주인 마야maya, 출입문의 붉은 눈이 빔을 뿜으며 빠르게 깜빡이자 투명체 유리캡슐들이 열린다

 

등에 파란 촉수가 달린 파동생물 카이가 들어온다 긴 혀로 내 얼굴과 마야의 눈을 핥는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나는 깨어난다 긴 터널 같은 환몽에서 마야도 깨어난다 우린 키스한다

 

카이가 가늘고 긴 촌충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마야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간다 누가 실명한 신의 눈을 뜨고 응시한다 마야의 살이 파랗게 변한다 머리칼은 죽은 버드나무 줄기처럼 흐늘거리고

 

유방은 한 쌍의 흑조가 되어 북두의 하늘로 날아간다 내가 손을 뻗어 마야의 뺨을 어루만지자 그녀의 눈 속에서 내 눈을 태울 듯 노려보는 카이의 눈, 내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누가 나를 부른다

 

나는 무명無名인데 귀조차 녹아내려 없는데 누가 계속 내 멸실된 이름을 부른다 그때마다 수축하는 잠 팽창하는 꿈, 마야의 눈 속에서 거대한 말미잘 촉수가 뻗어 나와 내 목을 휘감아 들어간다

 

순식간에 나는 마야 속에 갇힌다 꿈을 깬 육체 속에 남겨진 꿈처럼, 이곳은 망각된 시간의 외계外界일까 누구의 삭제된 슬픔이고 누구의 망실된 기억일까 미친 눈썹들이 흩날리는 해저 같다

 

나를 흡입한 마야의 몸이 풍선처럼 부푼다 나는 수평파를 따라 종이배처럼 핏속을 떠내려간다 죽은 아기들의 울음이 울리는 에코의 방을 지난다 살 속은 전자회로망이 실핏줄처럼 깔려 있고

 

나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거미줄 모양의 신경망을 지나 후두부로 간다 자율신경 계단을 오르자 주름진 방들이 보인다 마야의 뇌다 종양처럼 검은 꽃들이 피어 있다 망자처럼 떠도는 달

 

감금 이틀째, 척추 속이다 뼛속에 고인 구름을 따라 흉부로 간다 폐엔 파란 물이 고여 있다 죽은 자의 입술 닮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누가 음경陰經을 들고 태양에게서 불을 훔치고 있다

 

그것이 내 유실된 주검이라는 듯, 나는 척수를 타고 방광 쪽으로 방류된다 검은 음모로 뒤덮인 아름다운 해안이 나타난다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누가 검은 해변에서 다섯 개를 풀어놓고 있다

 

나는 모래언덕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본다 내 실종된 귀가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바다, 내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내 몸은 시퍼런 핏물로 뒤덮이고 수평선 너머에서 밀항선처럼 검은 간이 떠온다

 

절벽에서 누가 외치고 있다 마야! 마야! 날 내보내줘! 나도 따라 소리친다 소리칠수록 우리의 몸은 밀랍처럼 녹고 사방에서 카이의 웃음만 싸늘히 커진다 내 모든 기연其然이 불연不然인 이곳

 

감금 나흘째, 나는 마침내 항문에 도착한다 괄약근이 꽃처럼 오므라져 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몸을 빠져나간다 바깥은 이형의 외계다 지구로부터 108광년 떨어진 암흑우주 아이엠Iam

 

해마처럼 생긴 생물들이 반투명 액체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색색의 시간들이 기나긴 해초가 되어 파동을 따라 출렁이고 있다 수면 위로 동면 중인 내가 든 유리캡슐들이 무수히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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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석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현대문학』 2016년 11월호, 200~202쪽.

 

 

 

인공지능이 나오는 걸 보고 장난감 정도겠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지켜본 지난 70여 년만 해도 장난처럼 시작되어 점점 심각한 수준으로 변한 일들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시 한 편 가지고 또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이 어떻고 하더니 드디어 이런 시도 다 나오는구나……'하며 읽었습니다.

그렇게 '장난처럼' 읽다가 '어? 그게 아니잖아!' 했습니다.

타임 캡티브(time captive1)가 된 '나'와 마야, 카이, 누Nu가 등장하는 한 편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재미가 솟구치는 걸 느꼈고,

내가 captive가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가상현실인가, 일상인가?

이건 사랑인가? 아닌가?

…….

 

captive? captives?

이 영화(드라마? 소설? 시?)에 빠졌습니다. 그 '유리 캡슐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를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이 시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진

 

 

 

*1.명사의 경우 1. 포로(prisoner), 사로잡힌 사람, 죄수; 포획된 동물. 2. 사랑에 빠진 사람; […에] 반한 사람 of, to ‥] a captive to love[of her charm] 사랑[그녀의 매력]에 빠진 사람 She is a captive of her own lies. 그녀는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DAUM 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