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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65

우리가 떠난 후에도 제자리에 남아 거실 창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저 나지막한 산은 규모는 그저 그래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기상은 믿음직합니다.새잎이 돋아난 연둣빛이 수줍은 듯 곱던 날들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녹음에 싸여 저기 어디쯤 들어가 있으면 누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싶고, 몇몇 산짐승이나 새들, 온갖 벌레들이 한동안 마음 놓고 지낼 듯해서 더 푸르러라, 아주 뒤덮어버려라,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우리 인간들이 걸핏하면 괴롭히지 않습니까?매연도 그렇지만 저렇게 좋은 산을 야금야금 파먹어버립니다. 이래저래 가만두질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변화가 그들에게는 결코 이로울 게 없는데도 자연은 웬만하면 그 상처를 스스로 덮어버리고 우리가 잘라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저 자리를 지키면서 저 싱그러움, 푸르름으로 눈길을 끌어주고, 내가 그.. 2024. 5. 17.
내가 듣는 것들 소식 없다고 서운했겠지.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의 일이야. 저기 있을 땐 음악을 들어. 여기 있을 땐 책을 '듣고'. 그것뿐이야. 다른 일은 없어.저기 있을 땐 또 생각하지. 여기선 음악을 '듣고' 거기 가면 책을 듣는다고. 다른 일은 없어. 세상의 일도 내 일도 나의 것이 아니야. 음악은 왜 들어? 책은 왜 들어? 그렇게 물으면, 둘 다 같은 거야. 음악은 지금의 나와 지난날들, 더러 앞으로의 내가 이리저리 떠오르는 것이고, 책은 구체적이어서 '그래,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 정도야.결국은 같은 거야. 둘 다 듣고 나면 그만이야. 그것들은 다 '순간'이야. 앞으로도 소식 없을 거야. 나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2024. 5. 10.
민들레꽃 바라보기 "뭘 그렇게 들여다봐? 지나가다 말고.""너희 좀 보느라고.""한심해? 초라해?""굳이 후손을 퍼뜨려보겠다고, 일찌감치 꽃 피우고, 어디로든 좋은 곳으로 날아가서 내년에 꽃으로 피어나라고, 그렇게 꽃씨를 달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서 있는 가련한 꼴이라니...""어쭈구리, 너희 인간들은 다른 줄 알아?""우리가 왜?""고달프긴 마찬가지지. 오죽하면 결혼을 마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고달픈 것만도 아니지. 온갖 이유가 다 있을걸?""그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경우지. 애써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지.""내가 그 말이야, 이 사람아!""자식 두는 의미가 뭔지 의구심이 들긴 해.""잘해주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자식도 있지? 그렇지? 갖다.. 2024. 5. 9.
실리콘 코킹 기사들 보름 전에 통화한 코킹 업체 사장은 분명히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는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젊은 기사 두 명이었다. 일이야 기사들이 한다 쳐도 사장이 있어야 제대로 될 것 아닌가 싶었다."사장님은요?"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두 젊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들인데요, 아버지는 나이가 좀 많아서 (어쩌고 저쩌고)... 저희가 일 끝내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그 해명이 공손하고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아파트 뒷마당에서 올려다보며 어디쯤이 물이 새는 창문틀인지, 그런 곳이 어디 어디인지 가늠해 보고 업체 측에서 도착하면 깔끔하게 설명해 줄 작정이었고 그러면 그들은 "늙은이치고는 섬세하네" 할 것까지 예상해 두었는데 ('이런!') 그들은 실내로 들어오더니 .. 2024. 5. 7.
저 정교함! 햇빛만 받으면 그만일 텐데 굳이 저렇게 정교한 이유가 뭘까?내가 한 일 중 저 모습을 닮은 것이 있었나?나는 이렇게 허술한데 인간은 어떻게 해서 ─옳은 일이었든 그른 일이었든─ 자연을 정복해 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저 정교함에 대해 감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론들은 저것을 설명하려는 것이었겠지?저 정교함은 어떤 이론에 대해 기분이 좋을까?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를 읽고 메타세쿼이아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금방 참 좋은 나무구나 싶었다. 건축사 무라이 슌스케가 실제 인물 같고, 그가 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존경받는 것이 부러웠고, 그가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소 정원의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보며 살았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 .. 2024. 5. 5.
개구리 소리에 대한 생각 개구리마을  이 동네 개구리 소리는 유별난 데가 있다.실내에서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이웃 사람들 이야기 소리처럼 도란도란 들려오는데 문을 열면 돌연 어느 길잡이가 "야! 저 노인 문 열었다!" 하고 외친 것처럼 온 동네 개구리 소리가 일제히 이쪽을 향해 범람해 온다. 이건 완전... 전 동네 개구리란 개구리는 모두 들고일어나서 노래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초등학교 교장일 때, 우리 학교 합창단 아이들이 생각난다.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겠지 하고 강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일제히 '교장이다!' 하고 자세를 바꾸었다. 노래도 안무도 지휘를 더 열정적으로 수용한다. 그 개구리 소리가 절대로 일정하진 않다는 걸 이번에 알아냈다.밤이 이슥하거나 말거나 지치지 않은 척, 배 고픈 줄도 모르고.. 2024. 4. 29.
새들의 불평 혹은 비난 일찍 일어났다. 늦은 줄 알고 스트레칭을 다 하고 나서 시계를 봤더니 아직 다섯 시 반쯤이었다. 좀 속은 느낌이지만 다시 눈을 감아봤자 스트레칭을 해버렸으니 잠이 올 리 없다.아침식사를 했는데도 일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뭘 좀 들여다보다가 나갈까 하고 어정대는데 새소리가 들린다. 왁자지껄, 저희들끼리 야단이 났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고, 불평 혹은 비난을 늘어놓는 것 같다. 식사 마쳤으면 나오지 않고 뭐 하고 있나? 뭘 꾸물거려? 요즘은 해가 일찍 뜨는 거 몰라? 중천이야, 중천!참 나... 일단 나가보았다.조용하다.이것들이 어디로 갔지?차근차근 준비해서 나가려고 들어왔더니 이런! 바깥은 다시 시끄럽다.얼른 준비해서 분주히 나갔다.서늘하던 공기는 겨우 열 시가 되자마자 한여름 뙤약볕처럼 뜨겁다.얼.. 2024. 4. 27.
세수하고 거울 보다가 세수를 하고 거울 들여다보다가 이 얼굴이 이제 가랑잎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직 봄이고 몸무게도 줄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계절은 봄이지만 내겐 가을이 깊었거나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가랑잎인지도 모르지. 가랑잎? 그러면 이의제기 같은 것 없이 따르면 그만일 것이다. 순순히 따른다? 그건 "六十而耳順' 할 때의 그 이순(耳順)처럼 느껴지는 말이지만 나는 옛 성현처럼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애초에 그런 이순(耳順)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유감없이' '미련 없이' '홀연히' '표표히'... 뭐 그런 의미쯤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2024. 4. 24.
왜 그렇게 앉아 있나요? 비는 오는데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좀 민망합니다. 나는 아예 그 벤치나 의자에 앉지 않으려고 몸이 무거우면 선 채로 좀 쉬었다 걷지만, 그렇게 하는 건 나도 그렇게 앉게 되면 지금 그 모습과 한 치의 다름이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망하겠지요. 아니, 그 벤치에 앉게 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것입니다. 왜 혼자 그렇게 앉아 있습니까? 역시 노년의 문제겠지요? "노년에 관하여"(키케로)라는 책 혹 읽어보셨습니까? 키케로는 흔히 '노년에는 큰일을 할 수 없다' '노년에는 몸이 쇠약해진다'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노년이 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고 불평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노년에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체력 저하.. 2024. 4. 22.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네 정처(定處)도 의지도 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버려서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렇게 떠내려 간 것도 단 나흘 전이었는데 이미 추억은커녕 기억도 아니다. 그날 아침나절 나는 냇물을 따라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은 쓰고 있었다. 2024. 4. 19.
'雪柳'라는 이름 "雪柳가 피어났네~~" 淸님이 블로그 "Bluesky in Nara"에 그렇게 써놓았다. (https://nadesiko710.tistory.com/13412054). 설류? 뭐지? 뭐가 이 이름을 가졌지? 조팝꽃이었다. '조팝'은 튀긴 좁쌀 혹은 조로 지은 밥에서 유래한 이름이란다. 그곳 사람들은 설류라고 하는구나... 雪柳, 고운 이름... 문득 '윤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난 그 단어를 모른 채 살아오다가(그걸 몰라서 무슨 이변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연전에 '윤슬'(박상수)이라는 시를 보고 그 말, 그 시에 놀라서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아파트에 '윤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다. 그 아이 엄마 아빠가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주었겠지? 윤슬처럼 아름답게 빛나라고... 조팝나무를 .. 2024. 4. 14.
아, 정말... 이번 봄은 어쩌자고 이러지? 이를 데 없이 좋은 봄날이다. 어느 해에는 봄이 좀 오래 머물다 가지만 어처구니없을 만큼 금세 지나가버릴 때도 있다. 좋은 봄날이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자주 들으면 그해 봄은 금세 가버린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그런 말을 하면 특히 그렇다. 그게 몇 번쯤인지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정해진 횟수가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사람들이 봄, 봄 하면 여름이 금세 와버리는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그 말을 스스로 하진 않는다. 속으로 생각만 한 것도 올해는 이게 처음이다. 2024.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