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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92

그리운 숭례문, 그리운 서울남대문(Ⅰ) 읍내의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하숙이나 자취를 하며 지냈으므로 방학이 되어야 그 시골집으로 돌아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농사일도 좀 도왔지만, 겨울이면 마땅히 즐길 거리도 없어 그런 날 밤에는 아이답지 않게 걸핏하면 이 집 저 집 사랑(舍廊)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른들 중에는 짚 몇 단을 들고 오는 분도 있었었습니다. 그런 분은 남들이 화투를 치거나 잡담을 할 때 새끼를 꼬면서 이야기에 끼어들고 화투를 치던 사람들이 마련하는 밤참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 밤에 제가 그 사랑에 가서 어른들 틈에 끼어든 것은 그 분위기가 한없이 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잡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어쩌다 서울을 다녀온 사람이 서울역에 내리니까 남대문이 빤히 보이더라고 하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서울역.. 2008. 2. 15.
영어, 영어, 영어 지난 겨울방학에 3박4일간 일본에 연수출장을 다녀온 우리 학교 W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일본을 다녀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 선생님은 서슴지 않고 몇 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일본은, 작고 정교하고 단정하고 친절하고 질서가 잡혀 있으며, 학교 시설․환경에 대한 투자는 어느 정도 되었다고 보는지 정지되어 있는 느낌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어를 할 수 없어 영어를 했고, 그들은 일본어를 그대로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퇴근길의 광화문역에서 신길 방향 열차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경복궁역에서 경복고등학교나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농학교 남학생이 타임지를 들고 여학생과 수화(手話)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2008. 2. 14.
손가락 마디처럼 떨어진 동백꽃송이 지내다보면 주변에 이런저런 물건이 쌓이게 됩니다. 연구보고서나 단행본, 월간지 같은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필통이나 필기구, 책갈피, 명함 통, 신문기사 스크랩 등 잡다한 물건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물건들을 잘 모으는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우편물이나 그 우편물의 봉투까지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모아온 책을 ‘왕창’ 버리는 경험을 한 뒤로는 사소한(책에 비하면) 물건들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는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만큼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고, ‘아하, 그게 바로 물욕이었구나’ 싶기도 해서 스스로 제법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들으면 어쭙잖다고 하겠지만 이러면서 생에 대한 아집과 집착을 버리고 어느 날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되는구.. 2008. 2. 9.
2008년 새해 인사 행복에 있어서 수수께끼란 없다. 불행한 이들은 모두 똑같다. 오래전부터 그들을 괴롭혀온 상처와 거절된 소원, 자존심을 짓밟힌 마음의 상처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경멸로 인해, 더 심각하게는 무관심으로 인해 꺼져버린 사랑의 재가 되어 불행한 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아니, 그들이 이런 것들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하여 불행한 이들은 수의처럼 자신들을 감싸는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행복한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을 바라보지도 않고, 다만 현재를 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곤란한 점이 있다. 현재가 결코 가져다주지 않는 게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의미다. 행복해지는 방법과 의미를 얻는 방법은 다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 단지 순간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그.. 2008. 1. 16.
먼 나라로 살러가는 딸과의 작별 올해 서른여섯인 딸아이가 탑승한 런던 행 비행기는, 오늘 오후 1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각이 밤 10시 30분이므로 벌써 아홉 시간째입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아직도 세 시간을 더 날아야 착륙하게 됩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먼 나라에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2녀1남을 두었는데, 그 아이가 맏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일어나기 전에 세수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것은 포장지 한 장도 버리지 않지만 물욕이 없어서 옆에 있는 물건은 부모의 것이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남에게 뒤지는 것은 있을 수 없어 하는 성격입니다.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부탁할 일도 없고, 훈계할 일도 없는 아이입니다. 노란 가.. 2007. 12. 18.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에 관한 추억⑵ ▶ 중(中)·일(日)을 통해서 보는 국가간의 정의(正義)   히틀러는 어떤 일도 그답게 말한 것 같다. 상대국과 평형화된 힘을 가져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허약한 비겁자는 역사(力士)와 싸울 수 없으며, 무장하고 있지 않은 협상자는 만일 저울을 평형화시키기 위한 자신의 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여전히 저울의 다른 편에 얹혀 있는 브레누스(기원전 4세기 초 로마를 정복했던 갈리아의 장군)의 칼을 참고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아돌프 히틀러,서석연 옮김, 『나의 투쟁』㉻, 범우사, 1996, 434쪽).   이 대목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지만, 도대체 국가간의 정의(正義)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그 중의 한 가지가 된다. 국어사전에서는 ‘1. 진리.. 2007. 11. 17.
「고구려연구재단」설립에 관한 추억(Ⅰ) 이 글은 2005년 12월 이라는 책에 실은 것입니다. 이란 책은 교육부 편수국에 근무하면서 교육과정, 교과서, 역사왜곡대책 등의 업무를 담당한 전직 편수관들의 모임인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발행하는 책입니다. 이 블로그에 자주 들어오시는 분들께 미안하여 지난 세월에 쓴 글이라도 보여드립니다. 읽으시다가 지루하시면 중간쯤부터 읽어보십시오.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에 관한 추억(Ⅰ)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헤로도토스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특히 양자(兩者)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事情)----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 2007. 11. 15.
만약 교육부 장차관직 제의를 받게 되면 ‘국민이 대통령’이라던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으므로 이 정부의 제의를 받기는 이미 다 틀린 것 같고, 2008년 초에 새 정부가 들어서서 내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나 차관직 제의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그 제의를 받아들이려면 내 행적부터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정․비리를 저지른 일은 없는가, 말하자면 학교를 경영하면서 예를 들어 급식 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적은 없는가, 혹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탈세를 했거나 누구에게 받은 현금 다발을 사과상자나 굴비상자 같은 데 담아서 창고나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 두지는 않았는가, 국민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은 적은 없는가, 아들이 군대에 간다고 나가서 가수 생활을 하거나 외국에 가서 지내지는 .. 2007. 11. 6.
강의를 하려고 더러 출장을 다니며 저는 오랫동안 교육부의 교육과정․교과서 정책, 역사왜곡대책 등을 맡아서 자주 출장을 다녔습니다. 대체로 교원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담당자들이 모인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런 경력 때문인지 교육부를 떠난 지 3년이 훨씬 넘은 요즘까지도 더러 강의를 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제 그만둘까?’ 싶기도 하고, 거절할 수 있으면 거절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교육현실이 정체적이라고 판단되는 점을 생각하면 ‘그래, 내 생각을 알려주자’ 싶어서 용기를 낼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의 대부분은 학교교육과정의 구성과 운영, 교과서 편찬방향이나 제도개선 등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좀 주제넘지만 제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출장을 다녀본 경험에 .. 2007. 11. 2.
무서운 일가견(一家見) 교육전문출판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는 오랫동안『교육진흥』이라는 저널을 발행해 왔는데, 연전에 그 간행물을 그만 발행하겠다면서 제게 종간호에 실을 원고 하나를 부탁해온 적이 있습니다. 그 종간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이 글이 어떤 분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그런 분은 ‘별 희한한 놈도 있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일가견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1. 자기대로의 독특한 의견이나 학설(일가견을 가지다, 일가견이 있다), 2. 상당한 견식을 가진 의견(일가견을 피력하다, 一家言)으로 풀이되어 있었다. 공짜 책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 선배들이 이 글을 읽으면 주제넘은 놈이라고 하겠지만,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처지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년퇴임을 한 분들이.. 2007. 10. 2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Ⅱ) 그분은 알고 보면 가까이 갈 수 있는 틈을 준다 2005년 2월초부터 그분이 친지들에게 '한밤의 사진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나에게 특히 인상깊은 점은 그분이 취재하는 세상의 수많은 일들, 이런 저런 교육단상 같은 '멀쩡한' 사연 아래에는 꼭 볼 만한 사진을 곁들이는데 그것이 대부분 낯뜨거운(그래봤자 단 한번도 그 흔한 포르노그라피는 아니고 매번 예상보다는 더 '홀랑홀랑' 많이 벗어버려서 혼자 보는데도 '낯뜨거운') 장면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건 초기의 일이었다. 그분의 처남이라는 분이 나서서, 평생을 교육에 몸바쳤으므로 그런 사진을 모아 보내기보다는 교육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해왔다면서 그분이 당장 그 비판을 수용한 이후로는 내가 보기에.. 2007. 10. 16.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Ⅰ) 완연한 가을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가을을 탑니다.2005년 12월,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정년을 맞이한 함수곤 선생은 예전에 교육부 편수국장을 지냈습니다. 정년 기념으로 『함수곤의 편수교류기』라는 책을 냈는데, 그때 저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냈습니다. 올가을에는 그 생각이 나서 여기에 그 글을 옮깁니다. 좀 길어서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분은 노래방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분은 몇 사람이 오랜만에 모였을 때 저녁식사만 하고 헤어질 때가 있었을까 싶고, 식사까지 합쳐 3차까지는 가야 제대로 된 모임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 같다. 그러므로 누가 그분의 기분을 좀 맞추어 주고 싶다면 식사를 하면서 대뜸 "우리 식사하고 나서 노래방에 들렸다 헤어집시다" 하면 당장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었을 .. 2007.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