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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206

사지선다형(四肢選多型) 문항 페루에서는 선거를 할 때 다음 중 어떤 일을 금지하겠습니까? ① 도박을 하면 안 된다. ② 술을 마시면 안 된다. ③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④ 여자를 만나면 안 된다. 지난 23일(토) 오후, 라디오 토크쇼에서 들은 문제입니다. 페루는 요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친한 나라입니다. 답이야 뻔하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이 이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이처럼 가볍기만 하고, 맞으면 좋고 틀려도 그만이라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세상사나 학교에서 하는 공부나 사지선다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고, 사실은 사지선다형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은 정말 바늘구멍만큼 사소한 영역일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사지선다형은 자녀나 조카, 손자나 손녀의 .. 2010. 10. 26.
눈물 시름시름 앓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은 올해는, 지난 봄부터 아파트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 목소리 속에 자꾸 30여 년 전 제 맏딸이 깔깔거리며 무언가를 외치던 그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던 아무 생각없이 살아도 되던 괜찮던 그 때가 이렇게나 그립습니다. 두 번째의 수술대 위에서 흘린 눈물 속에는 자신의 한심함 때문에 참는데도 솟아오르던 그 눈물 속에는, 영국에서 잠시 귀국했던 그 아이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오랫동안 고3병을 앓았습니다. 고3병은 고3 때만 앓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고3병을 앓았습니다. 올해로 39세인 그 아이는 지금도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교육의 병.. 2010. 10. 14.
삶, 이 미로… 삶, 이 미로… 모처럼 하늘이 저렇게 푸릅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보던 그 하늘이구나 싶었습니다. 둘째 딸이 전화로 그러더랍니다. "아빠에게 전해줘요.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죽어서 되겠는지." 때때로 가슴이 울렁거리고 몸이 어지러워지는 그 증상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해서 몸을 자.. 2010. 9. 27.
외손자 선중이 Ⅶ-수행평가 0점- 무슨 수행평가가 있었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려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빵점을 맞았다고 하더랍니다. 그 시간까지 어떻게 참았을까요. 제가 가지고 간 준비물은 뒤에 앉은 아이에게 빌려주고, 자신은 짝꿍의 것을 함께 썼는데, 선생님께서 누구의 것인지 묻고는 0점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 녀석은 선생님께 왜 그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 녀석의 준비물을 쓴 그 뒤의 아이는 왜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을까?' - 옆의 아이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학부모의 입장이니까 그런 얘기를 할 입장이 아닙니다. 녀석의 외조모와 어미가 그 문제에 대해 전화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알게 됐으면 됐.. 2010. 9. 15.
외손자 선중이 Ⅵ 지난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녀석이 날씨가 무더운데도 제 산책길을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 모두들 시장에 가고 둘이서 남아 있었습니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나아가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으나 ○○초등학교까지만 갔다가 돌아온다니까 그 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좀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초등학교’ 하면 어느 동네에서나 그리 불안해할 만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요? 땀을 흘리며 돌아오는 길에 녀석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매일 이렇게 걸어야 해?” “그럼,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어. 그래 저녁 얻어먹고는 매일 저녁 이렇게 해.” 그러자 녀석이 다른 걸 가지고 대화를 잇습니다. “얻어먹기는 뭘 얻어먹어요!” “왜?” “할머니가 부인이잖아요.” “……” 뭐라고 하며.. 2010. 9. 9.
그 아이가 보낸 엽서와 음악 그 아이가 보낸 엽서와 음악 예전에 교장실 청소를 하러 오던 그 아이입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등대'라는 제 닉네임을 지어준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교장실에 오면 청소를 하는 시간보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책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교장실 청소는 하면 더 좋고, 안 해도 별로 표가 나지 않아서 오고 싶은 날만 오는 아이도 있고, 그 아이처럼 매번 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까 질서와 규칙도 지켜야 하고 누군가 청소도 해야 하지만,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도 좋고 가지 않아도 좋고, 가서 청소하고 싶은 날은 가고, 바쁜 일이 있거나 약속이 있거나 하면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고, 그게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지 그 아이들이 지.. 2010. 9. 8.
노인방치 VS 자녀와 놀기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손을 짚어라 …………  오랫만에 봤습니다. 초등학교 중학년쯤인 남녀 아이들 대여섯 명이 노래를 부르며 긴줄넘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 노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어 그 모습이 신기하고 정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은 저녁이나 주말에 아버지가 자녀를 데리고 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빠들은 "꼬마야 꼬마야"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주로 베드민턴이나 야구, 축구 같은 걸 합니다. 말하자면 매우 실용적이어서 흡사 체육 과외를 하는 것 같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눈치를 좀 보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TV CF에서는 예쁜 여성이 "요즘은 남자들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대요." 합니다. 신문에는 연일 아이들과 놀아줄 줄 아는 아빠에 대한 .. 2010. 8. 31.
외손자 선중이 Ⅴ-가슴아픈 사랑 제 가족들은 제가 외손자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걸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만큼 까다롭고 별난 성격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녀석에게 유별나게, 한없이 너그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한번도 용서 받아보지 못했던 것 같은 저의 가혹한 어린 시절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용서해주지 못한 제 지난날이 너무나 피곤하고 삭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이 들고부터는 누가 제 잘못이나 제 단점을 지적했을 때 한번도 뜸을 들이거나 잘 생각해보겠다며 제 반응을 유보해본 적이 없습니다. 결단코 없습니다. 두고두고 혼자서 속을 끓이더라도,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저는 결코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당장 제 잘못만 들어 사과하지 않은 적이 .. 2010. 8. 30.
"그 나라엔 과외가 없어요" 비가 자주도 내립니다. 포리스트힐이라는 마을의 계단을,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손자를 앞세우고 할아버지가 뒤따라 올라가며 묻습니다. 갑자기 비가 내려 학원 앞까지 우산을 가지고 갔겠지요. "그 나라에서도 이렇게 늦게까지 공부했니?" "아니오. 그곳엔 과외가 없어요." 손자가 대답했습니다. 그 뒤의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 손자가 '과외가 없는 나라'에 가 살다가 '과외가 있는 나라' '과외를 하지 않으면 거의 견딜 수 없는 나라'로 돌아온 모양입니다. '과외(課外)'가 왜 없겠습니까? 과외란 정규 수업 이외의 학습활동이라면, 글쎄요, 전 세계적으로 과외가 없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있다고 해도 그런 나라는 차라리 너무나 형편 없는 나라여서 살기가 그리 좋지 않은 나라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2010. 8. 25.
저승사자와 함께 가는 길 Ⅰ 저승사자는 정말로 그림이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모습일까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쓰고, 이목구비가 특이하게 뚜렷이 보이도록 하얗게 화장한 모습. 어느 유명 인사가 생전에 저승사자의 그런 모습이 연상되는 화장을 자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왜 괴기스럽게 보이는 화장을 한 것일까요? Ⅱ 하기야 수많은 저승사자가 어마어마하게 용감해보이는 장군처럼 생겼다거나, 시쳇말로 '꽃미남'처럼 생겼다거나, 연약한 여성 차림이거나, 하다못해 우리처럼 이렇게 평범한 모습이라면, 누가 괴기스럽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순순히 따라나서겠습니까? 그런 모습의 저승사자라면 저승으로 가자고 할 때 일단 어리광 같은 걸 부려보거나, 떼를 써보거나, 구구한 사정을 늘어놓아 보거나, 도저히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기세.. 2010. 8. 23.
명예와 미련의 정체 서점에서 『동아시아 미학』 뒷부분을 살펴봤습니다. 놀랍습니다(리빙하이李炳海, 신정근 옮김, 『동아시아 미학』 동아시아, 2010, 521~2쪽). 명예의 시동(尸童)이 되지 마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마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마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마라. 무궁한 도를 완전히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하게 하지,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직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을 뿐이다. 성인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다. 간다고 보내지도 않고 온다고 맞이하지도 않고, 오는 대로 그냥 호응하지 담아두지 않는다. 무위명시, 무위모부, 무위사임, 무위지주, 체진무궁, 이유무짐, 진기소수우천, 이무견득, 역허이이, 성인지용심약경, 부장불영, 응이부장. 無爲名尸,.. 2010. 8. 18.
불가사의(1) : 약 2300광년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아동도서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은 얘기도 썼습니다(2010.6.21). 부끄럽지만,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우주의 크기, 그 끝없음을 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문에 몇 광년 떨어진 어떤 별 이야기나 그런 이야기가 실리면, 우선 1광년(光年)의 거리부터 좀 짐작해보다가 그 1광년에 막혀서 그만 포기하고 맙니다. 이 '포기'는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과학자들이 다 알아맞혀서 설명해주는 것조차 도무지 실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뿐이겠습니까. 사실은 무엇 하나 분명히 인식하는 게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바보처럼 이렇게 지내다가 가는 거겠지요. 이 이야기의 자료가 되는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1 사.. 201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