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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명예와 미련의 정체

by 답설재 2010. 8. 18.

서점에서 『동아시아 미학』 뒷부분을 살펴봤습니다. 놀랍습니다(리빙하이李炳海, 신정근 옮김, 『동아시아 미학』 동아시아, 2010, 521~2쪽).

 

 

명예의 시동(尸童)이 되지 마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마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마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마라. 무궁한 도를 완전히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하게 하지,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직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을 뿐이다. 성인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다. 간다고 보내지도 않고 온다고 맞이하지도 않고, 오는 대로 그냥 호응하지 담아두지 않는다.

 

무위명시, 무위모부, 무위사임, 무위지주, 체진무궁, 이유무짐, 진기소수우천, 이무견득, 역허이이, 성인지용심약경, 부장불영, 응이부장.

無爲名尸, 無爲謀府, 無爲事任, 無爲知主, 體盡無窮, 而游無朕, 盡其所受于天, 而無見得, 亦虛而已, 聖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장자』 <응제왕應帝王>

 

 

그 다음도 그렇습니다. 리빙하이는 다음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전자(유가)는 기하학적인 미학으로 질박하고 중후하며 질서가 반듯하다. 후자(도가)는 색채학적인 미학으로 변화무쌍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도 엮이지도 않는다. 전자의 상징은 솥인데, 그것은 둔중하고 구체적이어서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후자의 상징은 산림인데, 그것은 안개나 비가 흩뿌리듯 가고 나면 남아 있는 자취가 하나도 없다.

가오얼타이(高爾太), 『論美』(甘肅人民出版社, 1982), 524~5.

 

 

"안개나 비가 흩뿌리듯 가고 나면 남아 있는 자취가 하나도 없다."(?)

그것에 대해, 리빙하이는, 바큇살의 빈 곳에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되고, 그릇의 빈 곳으로 인해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되며, 문과 창을 낸 텅 빈 공간에서 방의 기능이 생기듯 있음으로 인해 이로움을 낳게 되고, 없음으로 인해 기능을 하게 한다는 『노자』 11장을 인용하며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이 책 524쪽).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三十幅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挻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거기까지 봤는데, 하필 그 시간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세가 일어나서 더 읽지 못하고 서점을 나왔습니다. 옹졸한 인간이 '명예' 같은 것에 대한 집착과 가고나면 그만일 세상에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어한 '미련' 때문에 생긴 병입니다.

따지고보면, 나는 지금 불쌍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일들도 사람들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지금은 모를 뿐입니다.

 

계단을 오르자 구름이 보였습니다. '가고 나면 남아 있는 자취가 하나도 없'을 구름.

가을이 오고 있는 걸까요?

 

'가득하다' '충만하다' '비어 있다' '비운다' 그런 단어들의 의미를 생각해 봤습니다.

 

 

 

 

 

 

- 가령, 이미 어느 여인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사내에게 미련을 가진 여인은 불쌍하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도 없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 그건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마찬가지다.
  • 어느 남자(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부모라 할지라도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을 리 없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스스로 '나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이 남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총명한데도 혹은 높고 고귀한데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을 봤습니까?

 

노자도 그걸 수레바큇살, 그릇, 방(室)과 같은 사례로써 이야기한 것 아닐까요?

노자조차도 참 따분한 오후입니다.

모든 것이 다 저 구름처럼 덧없다 하고 말았다면 그 노자나 장자가 얼마나 쉽게 다가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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