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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저승사자와 함께 가는 길

by 답설재 2010. 8. 23.

 

 

 

  저승사자는 정말로 그림이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모습일까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쓰고, 이목구비가 특이하게 뚜렷이 보이도록 하얗게 화장한 모습.

  어느 유명 인사가 생전에 저승사자의 그런 모습이 연상되는 화장을 자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왜 괴기스럽게 보이는 화장을 한 것일까요?

 

 

 

 

  하기야 수많은 저승사자가 어마어마하게 용감해보이는 장군처럼 생겼다거나, 시쳇말로 '꽃미남'처럼 생겼다거나, 연약한 여성 차림이거나, 하다못해 우리처럼 이렇게 평범한 모습이라면, 누가 괴기스럽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순순히 따라나서겠습니까?

 

  그런 모습의 저승사자라면 저승으로 가자고 할 때 일단 어리광 같은 걸 부려보거나, 떼를 써보거나, 구구한 사정을 늘어놓아 보거나, 도저히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나오면 "주제에 저승사자로 왔느냐?"며 비웃어 보거나, 완강하게 버텨 보거나 그럴 것이고,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면 저승에서는 여기저기서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주 골치가 아플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승사자의 모습은 잘 웃지도 않을 것 같은 인상이고, 이해심이 전혀 없게 보여서 지금 숨이 넘어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기가 막히는 사정을 늘어놓아도 그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 할 것 같고, 그렇게 힘이 셀 것 같지는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호락호락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는 죽은 사람을 잘 아는 사람, 죽은 사람이 생전에 살던 그 동네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사자로 보낸답니다. 이건 제가 좋아하는 어느 시詩에서 읽은 겁니다. 그래야 잘 데리고 갈 수가 있으니까 그 시는 저승사자의 정체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므로 저승에서는 수많은 저승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거기는 네가 가라", "이번엔 네가 가라." "너도 한번 가봐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일단 여러 종류의 사자(使者)로 쓸 인물·인재들을 뽑아서 훈련을 시키고, 그 초보 단계에서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오는 저승사자를 시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사실은 이것도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무슨 도장(道場)이나 체육관 같은 곳에서 심사를 거쳐 초단 자격증을 주는 것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견디기가 참 힘든 날이었습니다. 속이 울렁거려 한시도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전에는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었고, 점심 때는 아내와 시장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를 마치면서 아내에게 "오늘이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하루였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냥 참으면 될 일을 괜히 그 말을 했습니다. 다 지나면 그만인데 그렇게 하며 후회를 합니다. 다른 사람 가슴아프게 해서 뭐가 좋은 건지……

 

  저녁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옆길을 하염없이 오르내렸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된 피노키오 몸처럼 하체의 뼈마디가 삐걱댔지만(심장을 고친 그 며칠 후 제 몸은 언제나 이렇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꾸 움직이다보면 울렁거리는 증세까지 잊을 수가 있어서 그렇게 걷습니다.

 

 

 

       

 

            

 

 

 

 

  그러다가 돌계단으로 된 아파트 샛길로 공원 앞 도로까지 내려가는 약 50미터의 그 짧은 비탈길이, 어느덧 '추억의 길'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예를 들면 덥거나 춥거나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오거나 부산이나 마산, 대전, 안동, 익산 같은 곳에 강의하러 가던 날 새벽, 택시를 타러 내려간 그 길, 그런 날 밤 다시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로 올라온 길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말에 예식장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길도 모두 이 길이지, 아파트 정문이나 후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은 거의 모두 차를 갖고 정문이나 후문을 나가고 들어온 날뿐이어서 그런 날이 기억 혹은 그 길을 오르내린 정겨움이 더욱 뚜렷한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다가 내게 저승사자가 오면 어디로 해서 함께 떠나게 될까를 생각했고, 바로 이 길이 그 길인가 싶어졌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길에서 뒤를 돌아보게 될 것이고, 그 순간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나를 데리러 온 그 저승사자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본 동네들을 다 돌아보고 가고 싶다고 하면, 그 요청은 들어줄까요? '레테의 강'을 건너면 어차피 다 잊어버릴 거라는 생각을 가진 사자라면 오히려 시간만 낭비한다며 저를 설득하려고 하겠지요?

 

  그 저승사자와 내가 서로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면 더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상대방은 나를 좋다고 하는데 나는 그가 별로인 사이, 나는 좋다고 매달렸는데 상대방은 시큰둥하거나 어떤 오해를 가지고 오히려 나를 백안시하던 사람, 상대방이나 나나 서로 눈치만 살피던 사이 등등 별별 아는 사이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면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좀 하고, 요청할 일이 있으면 그의 재량으로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승에 가면 어떤지 사전에 정보도 좀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르내린, 아파트 옆 그 길이 오늘 저녁에는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습니다.   

 

 

                                                      

2010.8.17. '그날 저녁 달도 저런 모습일까……' '다 변하는데 너 혼자만 변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상대에게는 배신이야.'

 

 

  이 글은 <노년일기>에 있던 것을 '공개'로 바꾸어 실은 것입니다.

  그 일기에 등장하는 실명(實名)들도 다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뭘 하겠습니까. 언젠가 내가 그걸 <공개>로 바꾸는 그 날, 사람들에게 그 이름들이 발견되면 누구라도 저승사자를 본 듯 섬찟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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